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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세기 16장 7-16절

 

자기 자신을 무한 사랑하라

서강대학교 철학과 최진석 교수는 사람이 죽기 전까지 버려서는 안 될 두 가지도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이다. 그는 이 두 가지는 죽는 순간까지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신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은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에 대한 무한 신뢰와 무한 사랑이 없이는 세상을 자존감 세우며 살아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진짜로 무한 사랑할 것은 하나님이다.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더 많이 사랑할 것은 하나님이다. 저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목사이기에 하나님을 무한 사랑한다. 하나님을 무한 사랑하니,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여기까지 왔다.

목사가 무한 사랑할 것은 세 가지다. 먼저 하나님을 무한 사랑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인을 사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사랑의 힘으로 교인과 자신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사랑의 은혜로 인해 자신을 사랑하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할 때 자신을 신뢰할 수 있다.

사랑하면 어떤 굴종도 감수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되 자신을 무한 사랑하는 것도 필요하다. 자신을 무한 사랑하면 자존심을 꺾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을 무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단 한 명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생명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한 사람의 정체성은 10의 422분의 1의 확률이라고 한다. 이는 ‘나’라는 이 우주에 단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진정 유아독존의 존재라는 말이다. 이런 통계는 ‘나’라는 존재가 어느 정도 귀한지를 알려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만들어주신 나를 무한 사랑하는 것은 중요하다.

사람들이 자살한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자살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자살이 증가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수 논객으로 괜찮다고 생각했던 정두언 전 국회의원의 극단적인 선택은 내겐 충격적이었다. 극단적인 선택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자신을 무한 사랑하면 굴욕을 참아낼 수 있다. 하갈이 그러했다. 하갈은 사라의 학대로 인해 살던 집에서 뛰쳐나왔다. 하갈은 나왔다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다. 하갈이 사자로부터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9절).”

여주인의 학대에 못 이겨 나왔는데, 다시 돌아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무한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니 자신을 무한 사랑하게 되었다. 자신에 대한 무한 사랑으로 인해 굴욕을 참아내기로 한다. 하갈은 하나님의 사자의 말대로 다시 사래의 수하로 들어갔다.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받은 사람은 어떤 굴종도 참아낼 수 있다. 그것을 13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이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이다. 자기를 살피시는 하나님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도 하나님께서 나를 살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굴종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녀가 굴종의 길을 택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한으로 사랑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가지 알면 못 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 사랑 확인은 자존심을 꺾게 한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랑하면 못할 것 없다.’

하갈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기에 못할 것이 없었더. 어떤 굴욕이라도 참아내겠다고 결단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에 자녀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떤 것도 굴종도 감수한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하갈을 무한 사랑하신다. 하갈만 무한 사랑하시지 않는다. 우리도 무한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하갈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죽어도 할 수 없다고 한 것도 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갈을 살피신 것처럼 우리도 살펴주시기 때문이다.

하갈이 사래를 함부로 대한 것은 하나님을 무한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조건이 “내 몸과 같인 다른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다.” 하갈이 하나님을 무한히 사랑했다면 사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늘 확인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그럼 자존심 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만큼 쉽다.

자기를 무한히 사랑하면 조연으로도 만족한다

하갈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을 무한 사랑하기 시작한다. 즉 이전과 완전히 사람이 달라졌다.

전에는 무작정 아브라함의 집안의 주연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주연인 사래를 멸시하다가 학대를 받아 쫓겨났다. 주연이 아니라 종보다 못한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무한 사랑하면, 주연이나 조연이냐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 하갈은 자신을 무한 사랑하지 않았기에, 엑스트라였음에도 주연을 꿈꿨다. 하갈은 사래로부터 쫓겨나는 순간 조연도 물 건너갔다.

하갈이 모든 사람에게 잊혀졌을 무렵 하나남께서 찾아오셨다. 이는 하나님의 무한 사랑의 덕분이다. 사람에게는 무한 사랑이 답이다. 하나님의 무한 사랑은 자신을 무한 사랑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주연이냐 조연이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자신에게 살아갈 사명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은 자신을 사랑하느냐가 중요하다.

십자가에 못박아야 조연의 삶도 산다

우리는 조연의 삶도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이다. 조연의 삶은 아무나 살 수 없다. 자기 자존심을 꺾어야 가능하다. 우리가 자존심을 꺾으려면 자기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받을 때 가능해진다.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으면 자존심은 절대 꺾어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조연의 삶으로 살라고 주셨다. 그럼 조연의 삶을 멋지게 살아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조연의 삶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을 박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갈이 자존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조연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리고 조연의 삶을 살아냈다. 사실 주연은 원래 사래였다. 하갈은 그저 조연일 뿐이었다. 조연의 삶이라고 낮춰 보면 안 되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갈이 추방당한 것은 조연으로 살아야 하는데 주연으로 살려 했기 때문이다. 하갈은 추방을 당한 뒤 당당히 조연으로 사는 것을 선택한다.

광야 생활을 해 봤더니 조연으로 사는 삶이 큼을 경험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받는 경험을 하자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으로 사래를 주인으로 모시고 조연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영적 메타인지가 있는가?

사람들이 불행한 삶을 사는 것은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처한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갈은 사래의 여종으로 사는 것이 만족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첩으로 사는 것을 만족하지 못하자 사래를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했다.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메타인지’가 중요하다. 자신이 아는 것을 안다고 하는 것,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파악하는 능력인 메타인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른다. 모르기에 자기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제 파악이 쉽지 않다.

하갈은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옴으로 영적 메타인지가 주어졌다. 영적 메타인지가 주어지자 사래를 여주인으로 모시겠다고 한다. 다른 말로 영원히 조연으로 살겠다고 했다.

우리는 조연의 삶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조연의 삶도 아무나 사는 것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배역 중 숫자가 가장 많은 것이 보조출연이다. 즉 엑스트라다. 보조출연자는 영화나 드라마에 한두 번 나올까말까하다.

주연의 삶도 축복이다. 조연의 삶도 축복이다. 엑스트라의 삶도 축복이다. 하나님께 선택 받았기 때문이다. 1ml당 정자의 수는 보통 6천만 개가 정상이다. 엄청난 숫자의 정자 숫자 속에서 선택받아야 내가 나올 수 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조연의 삶도 축복이라는 것을. 이 세상의 주연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사람은 모두 조연일 뿐이다. 그러니 조연의 삶도 축복이다. 주연은 조연의 뒷받침 없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다. 그러니 조연의 삶,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영적 메타인지를 갖고 살아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의 주연은 하나님이, 나는 조연인 것을 고백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의 주연은 아브라함과 사래다. 그리고 이삭이다. 하갈은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은 조연이다.

우리는 주연과 조연 따지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다름을 이야기해야 한다. 로마서 12장 6절 말씀처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은사에 맡게 역할을 주셨으니 내게 주어진 작게 보이는 조연도 엄청난 축복이다.

조연이 축복인 것은 내 삶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조연도 축복인가? 내 삶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래에게 추방당했을 때 내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조연으로 살기로 하자 내 자리에 생겼다.

지금 친구들이 직장에서 은퇴를 하고 있다. 대부분 올해 2019년도에 퇴직했다. 그럼 직장에서 내 자리가 사라진다. 이제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막막하다. 자리가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코로나19로 직장인이나 부교역자나 연말이 되니 고민이 깊다. 자리를 비워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직장인니 책상이 없어지면 미래가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하갈이 조연의 자리를 박치고 나가자 자기가 거할 자리가 사라졌다. 하지만 조연으로 살기로 하자 다시 자기 자리가 생겼다.

하갈이 조연으로 살겠다고 한 동기가 있다. 하나님께서 하갈의 씨인 이스마엘이 크게 번성케 하겠다는 약속 때문이다. 그것이 10절부터 15절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조연으로 사는 힘도 내게서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갈은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시니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며 살고자 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럼 하나님께서 주연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조연의 역할에 충성을 다해 주연으로 산 사람들이 많다. 그 중 한 사람이 여호수아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2인자 즉 조연으로 살았다. 그는 조연으로 사는 것에 만족했다. 그는 조연의 삶 자체를 축복으로 여겼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주연으로 사용하셨다.

반면 조연으로 사는 삶을 거부한 사람이 있다. 느헤미야가 성벽재건 공사를 할 때, 호른(애굽의 한 지역)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다. 이들은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역할을 나누고, 마음을 다하여 성벽을 재건하는데 끊임없이 방해를 했다.

조연의 삶은 아무나 살지 못한다. 겸손한 사람만 살 수 있다. 조연의 삶을 살려면 갖출 것이 겸손이기 때문이다. 겸손이 중요하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잠 3:3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기 때문이다(시 10:17)”.

삶에는 두 가지 보따리를 지고 산다. 근심 보따리와 축복 보따리다.

사람은 조연일 때 근심 보따리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조연도 축복이라고 생각하면 축복 보따리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에 겸손히 감사함으로 근심 보따리가 아닌 축복 보따리로 살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독서‘꽝’에서 독서‘광’으로》,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자와 묵상/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이기는 독서/절판》,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