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하라(마 18:15-18)”.

충고(忠告)라 함은 어학사전에서 ‘남의 잘못이나 허물을 충심으로 타이름’을 말합니다. 그리고 고자질(告者질)은 ‘남의 허물이나 비밀을 일러바치는 짓’을 말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요약해 보면, 교회에 속한 어떤 형제가 범죄 했을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 따라 야 할 권징의 원리(개인적 충고, 두세 증인을 통한 권면, 교회의 공식적 권징)를 밝혀줍니다. 동시에 본문은 교회의 결정에 앞서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사고를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누구 하나 잘못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 가르침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기에, 주님과 우리의 차이점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우선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8-20)”.

우리는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면 미안해할까봐 또는 심한 반발에 큰 싸움으로 번질까봐, 그냥 조용히 넘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포기해 버립니다.

두세 사람과 교회에 알리면 괜히 고자질한 것 같고, 그리고 형제의 반응은 조용히 말하면 될 것을 왜 고자질하여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느냐며 몹시 기분 나빠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신앙의 선배나 장로님 또는 목사님들에게 “당신들이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기도 하며, 상관하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됨을 알지 못한 채, 그냥 내 방식대로 살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신앙인들은 다 알 것입니다. 사랑하는 신앙인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두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랑에서 멀어진다면, 하나님은 참으로 슬퍼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나서, 베드로는 주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질문을 마치자 예수님께서는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라(마 18:22)”.

베드로가 범죄한 형제에 대한 용서의 횟수를 질문한 것은 마태복음 18장 15-20절 말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강조하신 것은 형제가 자신에게 아무리 많은 죄를 짓는다 해도, 계속해서 용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무조건적인 무한한 용서를 받았고, 지금도 용서를 받고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사랑의 충고를 고자질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인 것을 풀려고 노력해야 주님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며,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교회 안에서나 직장에서 나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해주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나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해줄 때, 감사해하면서 그 친구를 위해 기도하며 사랑해야 합니다. 좋은 친구를 가진 것에 대한 감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 쓸모없는 자존심 때문에 좋은 충고를 외면하여 인생을 망치는 일들이 이 땅에서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충고는 ‘나를 위험에서 구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자 역시 좋은 친구들의 충고 덕분에 옆으로 빗나가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 역시 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합니다. 좋은 벗을 두어 행복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다윗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충고를 의롭게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귀한 사람으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지 않습니까?

반면 사울 왕은 사무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아 ‘패가망신’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노아 시대 노아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의 멸망도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 역시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멸망을 자초하는 참담한 수모를 겪지 않았습니까?

헤롯왕 역시 세례 요한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써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악인으로 전해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의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망치거나 이웃을 해하는 일들이 사라져야 하겠습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남의 허물을 고요하게 충고해 주려고 하기는커녕, 사방에 퍼트려 상처를 제공하는 신앙인들도 있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신앙인들이라면 고자질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고자질하는 본인의 신앙은 더욱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당하는 분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어 교회를 버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고자질 때문에 한 영혼이 망가지는 일은 더욱 삼가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신앙인들은 이웃에 해가 되는 언어나 행동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이웃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자존심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자존심이 두텁고 강한 분들은 목사님이나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성도들의 어떤 충고나 권면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교회의 분쟁이 늘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충고해 주는 모두가 “나를 위한 나단 선지자들이다” 하는 마음으로 마음 문을 열 때, 비로소 교회는 평화로워지고 이웃들이 마음 편히 드나드는 복음의 고향으로 비춰질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 대한민국 안에는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앞이 보이질 않는 현 시대를 바라보며, 한숨을 짓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편이 갈라져 어두운 민낯을 드러내는 모습들은 누구의 책임일까요?

이들 모두, 각 교회 목사님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설교 때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면서 신실하고 정직하고 정의로운 말씀으로 충고해야 하는데, 성도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나 인기에 연연한 말씀을 전하다 보니 성도들의 신앙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됐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과 모든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오직 육적인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기 때문에 오는 현상 아닐까요?

하나님의 공의롭고 정의로운 말씀을 설파하면서도, 잘못을 저지르는 신앙인들에게는 과감하게 충고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는 충직한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존심은 정의로운 일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사고와 방식대로 고집하는 교만한 자존심은 음부의 세계에서나 통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지도자들부터 ‘자존심은 내리고, 선한 믿음은 올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백성들이 행복하게 사는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교회에서 대면 예배를 드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는 시대입니다. 모든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정의롭고 공평하신 뜻을 위해,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충고하는 일에 더욱 자존심을 높여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