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회, 종교 넘어 사회 전반 작동 기제 역할
종교 개혁 끌어낸 힘, 대학 등 중세 문명에 내재
경계와 배척보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 시도해야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

최종원 | 홍성사 | 412쪽 | 18,000원

“16세기 종교개혁은 공의회주의 실패가 낳은 필연이었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은 하나의 가톨릭을 분열시킨 사건일 뿐 아니라, 하나의 유럽을 영구히 분열시킨 사건이기도 하다.”

개신교를 탄생시킨 500여년 전 종교개혁은 중세 교회의 토양에서 발생했다. 종교개혁을 촉발한 중세 교회에 대해 면밀히 탐구하는 것은, ‘제2의 종교개혁’ 또는 ‘교회 갱신’ 요구가 계속되는 한국교회 현실에서 그냥 지나쳐선 안 되는 일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교회 주요 이슈였던 국가와 교회의 관계,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예배와 이단 신천지 논란 등 다양한 사건들로 몸살을 앓으면서 해답을 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가장 밀접했고 흑사병이 대유행하는 등 1천년간 온갖 사건이 발생했던 중세 교회에서 교훈과 적용점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역사란 발견된 문서와 유적만으로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유추’하는, 저자의 말처럼 “늘 이후에 돌아보는 것”이다. 의도성 있는 말과 행동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았던 역사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인들이다. 믿을만한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아 과거를 둘러보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최종원
▲저자 최종원 교수. ⓒ크투 DB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를 쓴 저자가 2년만에 주 전공인 중세사로 돌아왔다. 저자는 2년 전 초대교회사를 펴내면서 중세와 종교개혁사까지 3부작을 쓰겠다고 밝힌 바 있다. <중세교회사 다시 읽기>는 2년 전 많은 호응을 얻었던 전작처럼, 단순히 교회 역사만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국가와 주고받은 관계를 함께 살피고 있다.

전작처럼 시대 진행에 따른 주제별 구성을 취하고 있다. 교황제, 수도회, 이슬람, 서임권 논쟁, 십자군, 제4차 라테란 공의회, 연옥과 면벌부, 탁발수도회, 아비뇽 유수, 콘스탄츠 공의회, 위클리프와 롤라드 운동 등을 다룬다. 중세교회사는 초대교회사보다 덜 알려졌기에, ‘다시 읽기’보다는 ‘처음 읽기’로 여기면서 행간 곳곳에 한국교회에 대한 문제의식들을 녹여냈다.

중세는 서로마 제국 멸망(476)으로부터 시작된다. 제국의 멸망으로, 제도 교회가 국가의 역할을 대신했다. 아직 근대적 국가 개념이 자리잡히지 않은 때, 흩어진 중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준 최상의 가치는 종교였다. 그 중심에는 로마 교황청이 있었다.

“중세가 형성될 때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종교 역할을 넘어서서 사회 전반을 이어주고 작동시키는 기제 역할을 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의 행정 체제가 무너졌을 때 그리스도교가 그 체제를 고스란히 계승했다. 유럽에서 교회는 공적 행정 조직이었다. 출생부터 죽음까지 한 인간의 일생을 교회 교적부로 관리했다.”

교황은 프랑크 왕국(프랑스)과 신성로마제국(독일), 잉글랜드(영국) 등 주변 국가의 왕들과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교황권과 국왕권 간의 힘겨루기가 이어진다. 서임권 논쟁, 십자군, 아비뇽 유수 등은 그 산물이다.

초반에는 교회(교황)가 압도적이었지만, 점차 국가(세속 군주)가 주도권을 잡게 된다. 하나의 유럽을 지배했던 가톨릭은 분열하고, 그 마침표는 각 지역에서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아비뇽 유수의 원인 중 하나인 ‘카노사의 굴욕’을 그린 그림.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313) 테오도시우스 1세가 국교로까지 삼았지만(380), 이는 ‘위로부터의 변화였다. 제도와 권력 등 정치가 할 수 없는 부분들은 ‘수도회’가 맡았다. 아래로부터의 ‘영성 운동’이자 ‘사상적 기반’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종교성을 지탱해 줄 사상적 기반과 영감의 원천은 중심(교황청)이 아닌, 주변부에서 생성되었다. 그 주변부의 핵심은 수도회였다. 중세 가톨릭교회는 위로는 교황제, 아래로는 수도회가 조화를 이루며 존속했다.” 중세 초반에는 켈트· 베네딕투스 수도회가, 중·후반에는 프란체스코회와 도미니크회로 대표되는 탁발수도회가 중세 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이끌었다.

저자의 주장처럼 중세는 흑암으로 가득한 것만은 아니었다. 12세기에는 대학(우니베르시타스)이 생겨나 자유로운 토론과 사상 논쟁이 허용됐고, 여기에는 십자군을 통해 교류가 시작된 이슬람 문명이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이 점진적인 지적 발전은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으로 큰 위기를 맞는다. 스콜라학은 대학 내에 갇혔고, 이에 대응해 인문주의가 대안으로 등장해 종교개혁을 촉발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정당성 획득을 위해 중세를 암흑기, 중세 교회를 타락의 결정체로 단순하게 이해해 왔지만, 저자는 16세기 종교개혁을 끌어낸 힘이 중세 문명에 내재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교황 지배, 십자군 전쟁, 동서교회 갈등 등 중세 주요 사건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접근한다.

책의 마지막도 중세사를 다룬 대부분의 작품들처럼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아닌, 콘스탄츠 공의회와 위클리프다. 이는 저자의 마지막 <종교개혁사 다시 읽기>를 기대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중세와의 연결 속에서 읽지 않으면 종교개혁은 신화화된다. 종교개혁사는 면벌부와 성직매매 같은 중세의 타락에서 논의를 시작하면 바람직한 이해에 도달하기 어렵다. 중세의 결실인 르네상스 인문주의에서 시작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다.”

면죄부.
▲면죄부.
저자는 2년 전 <초대교회사 다시 읽기> 출판기념회에서 “이 시대 교회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천착한다면서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토대인 컨텍스트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해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길을 잃게 된다”며 “그래서 오직 성경만을 붙들고 정통 신학만을 탐구한다고 주장하는 집단이, 오히려 반사회적 행태를 여과 없이 노출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본다. 이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도피하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중세 교회의 ‘연옥과 면벌부(면죄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연옥 교리는 동방 정교회와 끝내 다시 하나 되지 못한 족쇄이기도 했다. 저자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사연을 안고 기아로, 역병으로, 전쟁으로 죽어갔다. 이 땅에서의 고단한 삶을 죄책으로 여기며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죽은 후 곧바로 심판의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문제였다”며 “교회는 이런 책임감 속에 그간 대중 또는 신학자들 사이에서 어렴풋이 제기되던, 선한 자들을 위한 천국과 사악한 자들을 위한 지옥 외에 제3의 거처에 대한 관념을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면벌부에 대해선 “중세인들의 사후 구원에 대한 두려움과 종교적 욕망을 매개로 태어나고 자랐다”며 “그 두려움과 욕망을 제도 교회의 권위, 성인과의 교통, 그리스도인의 참회와 헌신이라는 기제를 통해 정당화했고, 그 결과 중세인들은 제도 종교가 약속하는 손쉬운 구원의 방식을 좇아 분별없는 종교적 욕망을 표현했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면벌부는 연옥의 형벌을 제하는 영적 사면 기능뿐 아니라 사회적 자선, 구호 및 교육 인프라 구축에 활용된 적극적 형태 역시 존재한다. 신학적 논쟁과 별개로, 그 실천적 운용이 복지와 기반 확충에 전용됐다면 다소간 비판을 비껴갈 수 있다”며 “물론 이것이 중세 말에 만연한 미신적 대중 신앙 형태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그렇게라도 붙들고자 했던 희망은 헛된 맹목이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영화 루터
▲면죄부 판매를 옹호하는 가톨릭 교회의 문서들을 불태우는 루터. 혁명가로서의 카리스마가 돋보인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믿음으로 얻는 구원(칭의)’을 재발견하기까지, 중세 교회는 왜 이 보물을 찾지 못했을까? 이민족 사이에서 ‘전도’해야 했던 초대교회와 달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날 때부터 구원받은 존재’끼리 종교적 핍박도 없이 지내다 보니, 아니면 제도화된 교회에서 성경도 읽지 못한 채 오랜 기간 화석화된 교리만 읊으며 살다 보니,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린 것일까. 종교개혁은 그 지점에서 시작됐다. 중세 교회가 오늘의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도 거기에 있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은 사회 속 대중과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지 무거운 질문 앞에 있다. 종교의 가치는 선언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공감하고 수용할 때에 비로소 확인된다. 중세의 끝자락이 스콜라학의 퇴행이라는 쇠락으로 마무리되지 않고 새로운 정신의 탄생을 예고했다면, 지금 교회가 애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인다. 그것은 대중과 호흡하는 인문주의 감성을 꾸준히 키우는 것이다. 경계와 배척보다 열린 마음으로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