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인간의 ‘신비(mystery) 추구 경향’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단지 ‘합리성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경향성’으로 보려 한다. 이는 인간에 대한 영적인 고려 없인 단순히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으로만 접근한 결과이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갈망의 한 표현’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이 역시 ‘죄인의 전적 무능’을 고려하지 않은 비신학적인 접근이다.

이렇듯, ‘신비 추구 경향’은 아무리 이런 저런 고상한 이론으로 포장해도, ‘하나님 신앙’을 ‘신비’로 대치하려는 ‘죄 적 성향’의 발로이며, 신비라는 베일로 포장된 ‘어둠의 추상성의 유혹’에 이끌린 결과이다.

따라서 이런 이교적 ‘신비 추구’는 하나님께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자연인 최고의 ‘지성적 행위’인 ‘철학’으로 하나님을 찾아갈 수 없듯, ‘신령스러움’으로 포장된 ‘신비’ 역시 하나님께 다 닿을 수 없는 ‘육적 심오함’일 뿐이다.

신비의 이런 난맥상은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신비는 과연 영적인가’, ‘교회 내 신비 추구자들이 기독교인이 아닐 수 있는가’ 하는 것 등이다. 이것을 알려면 먼저 신비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신비주의 철학> 저자 강영계 교수는 신비를 크게 ‘중세적 신비주의’ 와 ‘일상의 신비’로 구별했다. 전자는 ‘철학적 신비주의’ 같은 본격적인 신비주의이고, 후자는 일상에서 우연히 경험되는 감성적(sensitive, 感性的) 차원의 체험이다.

예컨대 하늘에 아름답게 펼쳐진 형형의 아름다운 구름이나 오색 무지개를 볼 때, 호젓한 저녁 나뭇가지에 걸린 달을 볼 때, 혹은 엄마 품에 안긴 아기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거나 아름다운 음악이나 그림을 감상할 때 느끼는 신비감이다.

이런 신비 체험은 말 그대로 소박하고 일상적이나 때론 그것들이 사람 마음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을 만큼 강력한 치유력를 발휘한다.

예컨대 Archibald Rutledge가 쓴 ‘Peace In The Heart’에 나오는 내용 같은 것이다. 곧 적개심에서 상대방을 죽이려 권총을 품고 길을 가던 어떤 사람이 환한 달밤, 길 옆에 피어있는 하얀 월계수 꽃을 보고 살인할 마음을 버리게 된 그런 류의 경험이다.

◈신비주의

신비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는 본격적인 신비주의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1)문학적 신비주의

이는 언어가 가진 신비와 연관된다. 인간 사고에 미치는 언어의 영향력을 생각할 때, 문학은 그 어떤 것보다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매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감성적 발분’이 사람을 자연스럽게 신비적 체험으로 이끈다.

물론 문학 작품에 매료되어 눈물을 흘리고 밤새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사람까지 신비주의자로 분류할 순 없으나, 지나쳐 문학을 거의 종교의 수준까지 승격시키는 이들이 있다.

저들은 “말씀을 송이꿀보다 단맛(시 19:10)”으로 경험한 다윗의 경우처럼, 짧은 시구 하나, 문장 하나에 희비(喜悲)를 체험한다. 그들은 마치 경건한 신앙인이라도 되는 양, 돈이나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며, 문학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행의 가시밭길도 마다않는다.

저들에게 있어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더 이상 ‘밥’이 아니라 ‘문학’이다. 자신의 고통과 좌절을 그것을 통해 극복할 뿐더러, 삶의 의미와 목적도 오직 그것에서 발견한다. 이들에게 문학은 ‘구원’ 그 자체이며, 문학의 주제 역시 ‘인간 구원’이다.

너무 강렬하게 저들의 영혼을 사로잡아 버린 ‘인간 영감(human inspiration)’의 문학 정신이, 그들로 하여금 감히 성령 영감으로 된(moved by the Holy Ghost) 하나님 말씀을 뛰어 넘으려는 만용을 부리게까지 한다. 이렇게 신비체험으로 만족해진 이에겐 신앙의 필요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2)자연 신비주의

‘자연 신비주의’는 앞서 말한 ‘일상적이고 소박한 체험’으로서의 ‘신비 체험’과는 구분된다. 그것은 자연에서 거의 신성(?)을 경험한다.

예컨대 18세기 불란서 문학가 볼테르(Voltaire)가 어느 날 아침, 일출의 신비한 광경에 압도당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져 ‘나는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던 그런 류의 경험이다.

뉴턴(Isaac Newton, 1643- 1727)이 자연의 신비에 매료되어 “내겐 성경과 설교가 더 이상 필요 없다. 내겐 산, 하늘, 들판, 나무가 설교다. 나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부르짖게 한 그런 류의 체험이다. 또 나무, 새, 짐승들을 형제 자매라 부르며 자연과 ‘신비적 교감’을 나누었던 성 프란시스(Saint Francis of Assisi)의 신비 체험 같은 것이다.

우연적이고 소박한 ‘자연신비 체험’은 정서적인 고양과 치유력을 갖다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지나쳐 그것에 영적인 의미가 부여돼 ‘자연신비주의’로 흐를 때, 영혼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자연이 갖다 주는 ‘추상적인 신비 경험’이 참된 ‘하나님 개념’을 대신하고, 특별계시의 지위를 꿰차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의 낙관주의’에 주저앉혀지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루터는 이를 염려하여 “자연 계시는 경건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둔한 자가 되게 한다(롬 1:20)”는 주장을 했다.

(3)철학적 신비주의

철학적 신비주의의 도구는 ‘명상(meditation)’이다. ‘지식을 사랑한다’는 의미의 ‘philosophia’는 사실상 이들에겐 ‘초지식(超知識)’이다. 철학자들에겐 인간 지식으로 오를 수 있는 산은 너무 밋밋했기에, 그들은 명상을 통해 ‘하늘을 침범해 엿보고자’ 했다.

사실상 플라톤주의자들은 초월적 명상가들이었다. 그들의 이데아(Idea)는 초이성의 세계였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이성(理性)의 눈을 감고 명상을 했다.

일견, 모든 욕심을 초탈한 채 명상에 몰입하는 철학자들의 경건함은(?) 오늘날 하나님께 떼쓰는 천박한(?)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고상해 보일지경이다.

그러나 철학은 그 정향(定向)이 신학과 달라서, 추상적인 신(神) 개념에 관심 할 뿐이다. 그들의 기도라는 것 역시 사람들 사이의 교통도 하나님과의 교제도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신 역시 자기완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들의 ‘명상’이란 것도 결국 자기 ‘내면세계로의 고독한 여행’이다. 그리고 이렇게 명상을 통해 직접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철학적 신비주의’는 결과적으로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부인하고, 필연적으로 성육신 하신 ‘중보자의 필요’를 부정한다.

이 ‘철학적 신비주의’는 중세 기독교를 변질시킨 주범이었을 뿐 만 아니라 오늘 종교다원주의의 모판이 되고 있다.

(4)이적 신비주의

초자연적 이적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려는 신비주의 형태이다. 이들은 하나님은 능력이시기에, 그가 임재하는 곳에는 반드시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다고 믿는다.

예컨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던 엘리야의 제단에서처럼(왕상 18:38),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불과 바람과 표적의 역사가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은 표적과 이적을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못하며(요 4:48), 끊임없이 이적을 쫓아다닌다. 표적을 볼 때 흥분을 일으키고 믿음을 갖는 듯 하며, 헌신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돌밭과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처럼(마 13:20-22), 늘 일과성으로 그친다.

기독교는 이적이 따르지만, 이적을 위한 종교가 아니다. 예수님은 마술사도 아니며, 이적 행사가 그의 오신 목적도 아니다. 그의 이적은 그가 ‘죄인을 구속하러 온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알리는 일종의 ‘자기 계시’였다.

그리스도의 구속 성취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가 완성된 후에는 더 이상 이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이적을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의 수단으로 삼는 ‘이적 신비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에겐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말씀’과 ‘믿음’이 무용지물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왜곡된다. 이런 자들에겐 “우리가 성경을 펼치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개혁주의 잠언과, “그는 인격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지 않고 복음에서만 내려오신다”는 루터의 말을 들려 줄 필요가 있다.

(5)고난 신비주의

‘고난’을 신비 체험의 수단으로 삼는 신비주의 형태이다. 이들은 ‘금욕과 육체의 고통’을 통해 희열과 신의 임재를 경험하려고 한다. 이 신비주의는 여타의 신비주의와는 달리 항상 ‘자기부정적이고 희생적’인 모습을 띠기에 신비주의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이들은 ‘애니어그램(Enneagram)’의 두 번째 타입인 ‘순교자 콤플렉스(혹은 메시아 콤플렉스)’ 유형에 가까우며, 주위로부터 곧잘 ‘천사’라는 말을 듣는다.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면 ‘복음의 은혜’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자신을 연루시키기를 더 좋아하며, 자신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큰 위로와 기쁨을 얻는다.

그들의 신비체험은 너무도 강렬하여, 세상을 능히 멸시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게 한다. 오상(五傷)의 흔적을 갖고 일생 고난을 즐긴 ‘성 프란시스’, 일생 맨발로 다니며 거지 생활을 했던 한국의 프란시스 ‘이현필’, 그리고 평생 폐결핵으로 고생하면서도 무차별적이고 몰아적인 사랑을 행하여, 비난과 찬사를 받았던 ‘이용도 목사’ 등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모세(히 11:25)나 바울처럼(골 1:24) 순수하게 그리스도 신앙에서 나온 ‘복음적인 고난’에의 참여와 그로 인한 즐거움도 있지만, 건강하지 못한 소위 ‘자학적인(masochistic)’ 신비주의의 동기에서 비롯된 것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고난의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를 고난과 희생의 대가로 인식하게 하여, 값없이 주시는 ‘복음적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한다.

이제껏 삶의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주는 소박하고 우연적인 신비 체험으로부터 본격적인 신비주의까지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전자는 문제될 것이 없을 뿐더러 유용하기까지 하나, 후자는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무관할 뿐더러 오히려 기독교에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그것들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길인 ‘그리스도의 필요’를 부정하거나 그것들로 신앙으로 대치하려는 유혹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존 웨슬리(John Wesley), 벤자민 워필드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같이 서로 ‘상반된 신학 입장’을 가진 신학자들까지도 이 점에선 견해가 일치된다.

“기독교의 다른 모든 원수들은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가장 위험한 원수이다. 신비주의는 기독교에 치명상을 입히는 것이다. … 우리는 신비주의자든 기독교인이든 할 수 있을 뿐이지, 결코 그 둘 다일 수는 없다. 그 둘 다이려고 하는 가정은 대개 기독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복음적 신비체험

건전한 신앙의 체험으로서 ‘복음적 신비 체험’이 있다. ‘시편 22편의 복음’을 깨닫고 천국 입성을 경험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탑 체험(Tunnerlebnis)’,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는 중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 존 웨슬리(John Wesley), ‘이사야의 복음(사 45:22)’을 듣는 중 경험한 스펄전(C. H. Spurgeon)의 회심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내가 몸부림치고, 나의 의로움이나 덕성에 의해 획득되는 신비주의의 체험과 달리, 죄인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서 체험하는 ‘복음적 신비’이다. 이는 ‘종교개혁영성의 특성’으로서의 ‘이신칭의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비 체험까지도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진정한 신앙은 오직 믿음에 근거한 초(超)신비적인 것이다. 도날드 블레쉬(Donald G. Bloesch)의 다음의 글은 ‘오직 믿음’의 의미를 각성시키는 좋은 글로 보인다.

“신앙은 신비적인 축을 가진다. 그러나 신앙은 신비적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기초는 이 신비적 경험을 통해 사람을 만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앙은 신비적 교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개인적인 확신이다.

영적 생활의 높은 차원에서는 신앙이 경험적 지지를 대신하여 결국에는 절대적 신뢰의 형태를 띠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좁은 의미에서 신비적이라기보다는 초신비적인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그 이유는 높은 수준의 신앙은 하나님 임재를 느끼는 것이기보다는 적나라한 신뢰로 특정 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의 영적인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 분께서 이 경험 안에서 혹은 이 경험 없이도 사람에게 오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할렐루야!

※본 칼럼 내용은 2005년 발간된 이경섭 목사의 ‘개혁주의 영성체험’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