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에서 자주 곡해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빛’에 대한 개념이다. 이는 ‘빛’이 기독교를 비롯해 동서양의 모든 종교에서 공유하는 개념이어서 둘이 무분별하게 혼용한 때문이다.

죄로 육신 안에 감금된 ‘신적 섬광(divine flashes)’이 ‘신적 영지(Divine Gnosis)’를 통해 깨우침을 받는다는 영지주의(gnosticism). 순간의 ‘빛’으로 하나님을 조우한다는 마이스트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 독일 신비주의자)의 ‘섬광’적 신비주의. ‘내면의 빛’과 ‘내면의 소리’를 통해 인간 안에 내재한 신성(神聖)을 자력으로 찾고 체험할 수 있다는 퀘이커(Quakers, George Fox1624-1691) 등은 성경의 ‘빛’ 개념을 왜곡시킨 대표적인 단체들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 내면의 심연에 ‘빛을 저장하는 autos(그 자체)’라고 부르는 ‘내적 성소’가 있다는 스토아(Stoics) 철학에 뿌리를 박고 있다. 곧 인간이 타락했어도 여전히 그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비주의, 알미니안, 종교다원주의는 다 이의 부산물들이다.

그리고 이 ‘빛’이 ‘신비주의자들’에게는 ‘영과의 조우(encountering the Spirit)’로, ‘이성주의자들’에게는 ‘깨달음’, 곧 계몽(enlightening)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석가모니가 보리수나무에서 깨달음으로 해탈하여 부처가 됐다는 불교의 ‘돈오(sudden enlightenment, 頓悟)’와 다를 바 없다.

◈빛이신 하나님

성경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빛(시 104:2, 딤전 6:16, 요일 1:5)’이시라고 말한다. 성부 하나님도 빛이시고(시 104:2, 딤전 6:16, 요일 1:5), 성자 그리스도도 ‘빛(요 8:12)’이시고, 성령도 빛이시다(히 6:4).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을 때 “참 빛(the true Light)이 세상에 왔다(요 1:9; 3:19)”고 했다.

그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세상에 ‘참 빛’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오기 전에도 종교, 철학, 문화 같은 ‘유사 빛들(fake lights)’은 넘쳐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했다.

철학자들이 ’천국을 넘보는 자(coveter Heaven)‘들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 354-430)마저 평생 ’플라톤 철학‘의 누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니, ‘이성의 빛(light of reason)’이 대단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성의 빛’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그것과 ‘하나님의 빛’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구릉이 있다. 둘은 불연속선상에 있기에, 전자로는 후자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세상에는 없었던 유일무이한 ‘참 빛(the true Light)’으로 오셨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요 1:9)”. 그 ‘참 빛’만이 흑암에 갇힌 죄인의 영혼을 건져내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다(요 1:12).

사도 마태가 그를 보았을 때, 이제까지 못 보던 ‘참 빛(the true Light)’, 곧 ‘큰 빛(great light)’이었다(마 4:16).

반면 성경은 죄를 빛과 차단된 ‘흑암’에 비유했고, 죄인을 “흑암에 앉은 백성…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마 4:16)”이라고 했다. 이는 죄가 빛이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장벽을 만들어 그를 흑암에 가두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스토아주의(stoicism)의 ‘내적 성소(autos)’도, 영지주의(gnosticism)의 ‘신적 섬광(divine flashes)’ 같은 것도 죄인 안에는 없다. 미중생한 죄인의 영적 상태는 창조 기사에 나오는 “혼돈, 공허, 깊은 흑암(창 1:2)” 그 자체였다. 단 한줄기의 빛도, 혹은 감춰진 ‘빛의 저장소(autos)’도 없다.

흑암 속에 갇힌 죄인은 오직 ‘하나님의 빛’이 인간의 마음에 비출 때 비로소 ‘빛’을 갖는다. 그 빛을 성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라고 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성경은 이 빛을 다른 말로 ‘구원’이라 불렀다(행 13:47). 그리고 죄인이 그‘빛’을 받아 ‘흑암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을 ‘구원받았다(골 1:13, 14)’,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반면 죄인이 ‘하나님의 빛’과 단절돼 흑암 속에 갇힌 것을(유 1:13) ‘사망’,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

◈빛과 생명

‘빛’은 성경에서 ‘생명’을 상징한다. 일견 생명과 빛은 무관해 보이나, 둘은 서로 동일시 혹은, 비견(比肩)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둘은 서로를 부연하며 서로의 개념을 뚜렷이 해 준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여기서 ‘생명의 빛’은 ‘빛이 생명의 소유’라는 ‘소유격’ 개념보다는 ‘동의어’ 개념이다. 곧 생명이 빛이고, 빛이 생명이라는 말이다. (주지하듯 ‘소유 주체’가 인격이면 ‘소유’와 ‘소유 당함’의 개념이지만, ‘소유 주체’가 비인격이면 ‘동의’ 혹은 ‘부연(敷衍)’ 개념이다.)

더 풀어서 설명하면, ‘빛은 생명같이 소중하며 빛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는 뜻이다. 성경이 인간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엡 2:1)’ 함은 죄인에게서 ‘하나님의 빛이 떠났다’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게 됐다(롬 3:23)’는 말이다.

또 이 빛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람 속의 ‘하나님의 빛’을 의미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여기서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빛은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빛’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 죄의 장벽이 무너지면, 흑암에 갇힌 죄인에게 ‘하나님의 빛’이 임한다. 이는 스토아주의나 영지주의의 내재하는 신적 섬광을 종교 행위로 발현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함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 준다.

하나님의 빛은 죄인 안엔 내재하지도 않을 뿐더러, ‘자가 생산(self-production)’되지도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희생이 죄의 장벽을 걷어낼 때,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유입된다.

그리스도의 빛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생명을 희생시켜 죄인에게 하나님의 빛을 유입해주는 ‘통로’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호칭된다. 그의 생명의 희생 없인 하나님의 빛을 입을 수 없으니, 그 역시 생명으로서의 빛이다.

뿐만 아니다.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그는 하나님의 빛에 이르게 하는 ‘통로’인 동시에 목적지로서의 하나님의 빛 자체시다. 따라서 그를 빛으로 명명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라는 말씀에서처럼, 그리스도의 빛이 임했을 때 모두가 그에게서 하나님의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와 한 동네에서 살았던 동향인들, 직접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에게서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했다.

이는 그리스도의 빛이 하나님의 빛과 달라서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하나님의 빛에 이르는 통로, 곧 자기를 위해 죽으실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죄인을 흑암에서 건져내는 하나님의 빛은 그것의 통로인, 그리스도를 구속주(救贖主)로 믿는 믿음을 통해 그에게 비춰진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기 원하시는가? 요상하고 신비한 방법을 찾지 말고, 예수를 ‘내 죄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으시라!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