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40일
▲영화 <광야의 40일> 중. ⓒ크투 DB

본문: 요한복음 1장 19-27절

세례 요한이 자신을 증명하는 본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물로 세례를 주는 요한을 보고, 매우 특별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세례 요한에게 보냈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 궁금해서였습니다. 세례를 주는 요한이 오신다던 그 메시야가 아닌가에 대해 궁금했던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명성이 하늘처럼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이 배경을 중심으로 ‘세례 요한의 자기증명’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20절)”.

세례 요한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자신을 증명했습니다. 오시는 주님에 비하면, 자신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에게 높이 추앙받는 상황에서 유혹을 물리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내가 바로 메시아니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로마의 압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메시아 대망론이 팽배하던 때였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어 그 명성이 대단히 높아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은 혹시 세례 요한이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사회적 명성이 대단했다는 반증입니다. 그는 명실공히 ‘떠오르는 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세례 요한은 공개적으로,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정체를 밝혔습니다. 그는 많은 유혹을 물리치고,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힌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2.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한낮 소리에 불과하다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22-23절)”.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의 소리’라는 말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는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태도입니다. 세례 요한이 잘 나가다 보니 그를 모함하려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이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책을 잡혀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소명에 충실한 태도를 보여 함정을 모면하게 됩니다.

당시 바리새인들(the Pharsees)은 ‘분리주의자’ 또는 ‘구별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는데 매우 엄격하여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점차 세력이 강해졌습니다. 이제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요구를 국가에 제시하여 관철시키기도 합니다. 실로 그들은 막강한 정치적인 세력이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나중에는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 자기 도취와 영적 자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만, 어쨌든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권세는 대단했습니다.

이 답변을 들은 유대인들은 많이 실망했을 것입니다. 자기들 딴에는 인기와 명성을 업고 그리스도 행세를 하는 것으로 책을 잡아 세례 요한을 처단하려고 노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는 한낮 광야에 외치 사람의 소리일 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의 용기와 지혜를 보게 됩니다.

3. 나는 물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내 뒤에 오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25-27절)”.

세례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내 뒤에 오시는 그 분’은 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암시를 합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신분의 차이를 말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이 얼마나 대단하신지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 분이 그리스도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뒤에 오시는 그 분이 바로 여러분들이 기다리는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직접적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한없이 낮춤으로 오시는 주님을 크게 높였습니다. 사람이 높아지기는 쉽지만, 스스로 낮추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은 올라가면 갈수록, 더 올라가고 싶은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 어떤 사람이 군중을 앞에서 고무되어 자신은 ‘하늘의 보좌를 흔드는 사람’이라든가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라고 말하는 것과 너무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우리는 지금 스스로 높아지기 쉬운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겸손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우리로 스스로 착각하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소서,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어디서나 우리는 앉고 일어설 줄 아는 구분력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