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해줘 2
▲사이비 장로의 위선과 악행을 고발하는 교회비판 드라마 <구해줘 2>.
본문: 사도행전 21장 17-26절


깨진 유리창 이론

사회범죄심리학에는 ‘깨진 유리창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이론은 1982년 제임스 윌슨(James Wilson)과 조지 켈링(George Kelling)이 공동으로《Atlanta》라는 월간잡지에 발표한 이론인데요. 깨진 유리창처럼 사소한 것들을 방치해 두면, 나중에는 큰 범죄로 이어진다는 이론입니다.

평소 자주 지나던 거리를 걸어가는데 어떤 건물에 누군가 돌을 던졌는지 유리창이 깨진 것을 보았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다음날에도, 또 그 다음날에 그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있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혹시 ‘도둑이 들었나?’ 장사가 망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저 건물은 주인이 관리를 포기한 건물이라고 까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깨진 유리창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돌을 던져, 나머지 유리창도 깨뜨리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이렇게 유리창이 깨진 상태로 그대로 있으면 그 건물에서 더 큰 범죄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곧 ‘깨진 유리창 이론’은 깨진 유리창과 같은 작은 부분이 도시를 무법천지로 만들 수 있음을 경고하는 이론입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에서는 100-1=0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소한 실수 하나가 전체를 망가뜨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깨진 유리창 이론은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사소하지만 사려 깊은 사랑과 관용을 통해 100+1=200의 결과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의 결과도 만들 수 있습니다.

관용의 능력

1930년 어느 날 상점에서 빵 한 덩어리를 훔치고 절도 혐의로 기소된 노인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판사가 노인에게 정중하게 물었습니다.

“전에도 빵을 훔친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처음 훔쳤습니다.”
“왜 훔쳤습니까?”
“판사님 저는 선량한 시민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사흘을 굶었습니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다 떨어지고 눈에 보이는 게 없었습니다. 배고픔을 참지 못해 저도 모르게 빵 한 덩어리를 훔쳤습니다. 죄송합니다.”

판사는 잠시 후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하다 할지라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법대로 당신을 판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에게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당시 10달러는 노인에게 너무나도 큰돈이었습니다. 노인의 딱한 사정에 선처를 기대했던 방청객들은 실망스럽다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판사는 논고를 계속했습니다. “이 노인은 이곳 재판장을 나가면 또 다시 빵을 훔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 노인이 빵을 훔친 것은 오로지 이 노인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 노인이 살기 위해 빵을 훔쳐야만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방치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동시에 이 법정에 앉아 있는 여러 시민들께서도 십시일반 50센트의 벌금형에 동참해주실 것을 권고 합니다.”

그러면서 판사는 자기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 모자에 담았습니다. 판사의 선고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둔 돈이 모두 57달러 50센트였습니다.

판사는 그 돈을 노인에게 주도록 했습니다. 노인은 돈을 받아 10달러를 벌금으로 내고, 남은 47달러 50센트를 손에 쥐고 감격의 눈물을 글썽거리며 법정을 떠났습니다.

이 명판결로 유명해진 ‘피오렐로 라과디아’ 판사는 그 후 1933년부터 1945년까지 12년 동안 뉴욕시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했던 존경받는 인물이 됩니다.

철학자 볼테르는 관용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용은 인간만이 지니고 있는 덕목이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약점과 실수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서로 서로 용서하도록 하자. 그것이 제1의 자연법이다.”

왜 세상이 날로 메말라 가는 것일까요? 왜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하고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일까요? 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관용하지 못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관용하는 바울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인 야고보를 방문합니다. 마침 야고보는 장로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문안하고 하나님께서 3차 전도여행 동안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함께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이방인 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울에게 안 좋은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 소문은 바울이 이방인들 가운데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염려스러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보게 바울,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수만 명이 넘게 있다네.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성을 가진 사람들이지. 만일 이 사람들이 자네가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걸세.”

그들은 이 말을 하면서 바울에게 그 문제를 풀기 위한 한 가지 해결책을 제시해 줍니다. 그 해결책은 서원한 네 사람이 있는데 이들을 데리고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결례 비용까지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바울에 대해 들은 것이 거짓된 소문이요 바울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사람인 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서원이라는 것은 나실인의 서원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행하게 됩니다.

바울은 지금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유대인입니다. 바울은 모세를 배반한 적도 없고 그들이 말한 대로 가르친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억울하다고, 너무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울은 이방인 교회 가운데서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까지 가지고 왔는데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섭섭할 수도 있지만 묵묵히 그것을 관용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바울은 항상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의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감정대로 했다면 예루살렘 교회가운데 많은 혼란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관용의 힘을 가진 로마

시오노 나나미가 쓴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로마의 강점으로 관용을 들고 있습니다. 로마는 폐쇄적이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정복한 민족 중에서 자신들의 왕을 선출할 정도로 개방적이었습니다. 나나미는 이러한 관용정책이 로마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든 원동력이라고 주장합니다.

1790년 미국 헌법의 기초자 중 한 사람인 제임스 윌슨도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로마인은 자국의 힘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주민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왔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자진해서 로마로 쏟아져 들어오게 했던 힘이 바로 관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야고보서 3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이 말씀을 보면 관용은 위로부터 난 지혜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라는 것입니다.

또한 빌립보서 4:5절에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는 말입니다.

곧 바울은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관용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이야기 전에 그에 대비되는 악한 육체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바울은 육체의 일들을 나열하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육체의 일 가운데 분쟁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분쟁, 당 짓는 것, 분열은 모두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관용의 반대편에 있는 단어들입니다. 결국 하나 되지 못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누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관용이 필요한 시대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지금 이 시대가운데 가장 필요한 것이 ‘관용’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 19가 장기화 되다 보니 사람들 속에는 염려와 불안이 가득 차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많이 예민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종종 매스컴에서 마스크를 안 쓴 문제로 인해 서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종종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조금씩만 이해하고 배려하면 저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텐데’라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에 ‘우리’가 있습니다. 첫째, ‘편협적인 우리’입니다. 둘째는 ‘포용적인 우리’입니다.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우리는 정말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지역감정이나 종교나 이념에 따라 편을 가르는 편협적인 우리는 위험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보십시오. 전 국민이 두 편으로 나뉜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인터넷에서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의 글이 올라오면 저주에 가까운 악플을 답니다. 그 사람의 의견을 들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국회의원들이 청문회나 대정부 질문을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질문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대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답을 하려 하면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지금‘포용적인 우리’가 아니라 ‘편협적인 우리’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포용적 우리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편협적인 우리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관용을 베풀라

우리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부터 관용을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부터 관용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교회에서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신앙의 수준이 다릅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은 분도 있고, 이제 예수님을 알아가며 신앙생활의 맛을 알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이 외에 신앙생활의 형태도 좀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찬양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분 말씀 읽는 것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인정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할 태도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야 하나 된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관용을 베푸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형편이 좋을 때는 넉넉한 마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질 때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어렵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좋지 않은 상황이 계속 될 때는 자기도 모르게 관용적 태도를 갖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형편이 좋을 때든 어려울 때는 관용을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관용을 베풀기 위해 경계를 허물라

우리가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경계를 허무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기법 중에서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법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처음 시도한 기법인데요. 인물 곳곳의 윤곽선을 일부러 흐릿하게 처리해 경계를 없애는 기법이라 합니다.

이 기법으로 다빈치가 그린 대표적인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좀 모호하지만 신비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경계를 허문다는 것은 곧 조화롭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경계가 필요한 부분들은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 되기 위해 허물어야 할 경계는 허물어야 합니다. ‘스푸마토’는 그림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도 필요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도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9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바울은 사람을 얻고자 할 때, 기꺼이 그들의 눈높이에 자신을 맞추었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들을 얻기 위해 경계를 허물고 관용을 베풀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경계를 허물고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관용을 베풂으로 사람도 얻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관용이 진정한 관용이다

예수님은 관용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 잡혀온 여인에게 관용하셨습니다. 자신을 판 가룟 유다에게도, 자기 살겠다고 도망간 제자들에게도 관용하셨습니다. 자신에게 고침을 받고 따랐던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군중으로 돌변했을 때도 관용하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향해서도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진정한 관용은 십자가의 관용입니다. 십자가의 관용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어 복음으로 하나 되게 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철저하고 남에게는 관대하라

관용은 남에게 베풀었을 때 능력이 됩니다. 곧 남에게는 관용을 베풀지만 자신에게는 철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반대로 행동합니다. 자신에는 너무나 관대한데 남에게는 철저합니다. 자신에게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는데, 남에게 대해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집니다. 자신이 하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고 말합니다.

예전 어떤 기독교 잡지사에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설문지의 질문 가운데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제일 불편하고 무서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1위는 “40일 금식기도한 사람”입니다. 2위는 ‘철야기도 잘하는 사람’입니다. 3위는 ‘신학 공부한 장로님’입니다.

금식기도, 철야기도, 신학공부는 개인의 영적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귀한 도구가 되기 합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왜 목사님들이 이런 분들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일까요? 이런 분들 중에 상당수가 이 은혜를 자기 성장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판단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40일 금식했으면, 얼마나 은혜가 넘치겠습니까? 하지만 금식기도가 끝나고 하는 말이 “우리 목사님은 은혜가 없어”, “우리 장로님들은 더 기도하셔야 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철저하고 남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나에게는 기준을 높이 세우고, 남에게는 기준을 낮추어야 합니다. 상대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해야 하지만, 나에게는 좀 더 철저해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하지만 우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기에게 철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조금 더 이해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가 될 수 있고 서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경계를 허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에게는 관용을 베풀어야 하지만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나에게는 철저해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는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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