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Andrey Grinkevich on Unsplash
본문: 창세기 16장 1-6절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기도 제목이 많다. 그 중 가장 큰 기도제목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다음 기도제목이 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는가?”

가장 작은 기도 제목이 있다. “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이런 기도 제목은 삶의 과제다.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기도하는 기도가 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다가온 한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한 시간이 나를 만드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이 한 시간이 나를 만든다. 오늘 하루가 나를 만드는데 결정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 제목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하루는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셨다. 결국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것에 맞게 살아내야 한다. 그 책임이 우리 각자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한 시간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하루가 중요하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영광을 가리는가가 되기 때문이다.

프로 의식과 포로 의식

의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프로 의식과 포로 의식이다. 뭔가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포로 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잡혀 사는 사람은 ‘영적 포로 의식’에 잡혀 사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아마추어보다는 프로를 좋아한다. 아마추어 의식보다는 프로 의식으로 살면 좋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의식은 프로 의식, 즉 하나님의 포로 의식이다. 하나님 말씀에 잡혀 있는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하갈은 말씀에 잡혀 살지 않았다. 자기 포로 의식에 잡혀 살았다. 사래는 자신이 출산하지 못함을 알자, 여종 하갈에게 출산 기회를 준다. 이는 하나님의 포로 의식에 잡혀 살고 있는 하갈임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포로 의식에 잡혀 살고 있다. 사래가 여종 하갈에게 들어가라고 하자, 사래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하갈은 하나님의 포로 의식이 없었다. 자신에게 기회를 준 사래를 깍듯하게 대우해야 했다. 하지만 하갈은 사래를 무시했다.

배려,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타낸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있단다. 그것은 배려하느냐 배려하지 않느냐다. 특히 약자에게 배려하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고 한다.

선진국은 ‘약자’ 배려에 능하다. 하지만 후진국은 ‘강자’ 배려에 능하다. 서울과학종합대학교 교수이자 25년째 리더십을 연구하는 신재구가 쓴 《리더의 길》에서 한 말이다.

출산의 측면에서 하갈에게 사래는 약자다. 그럼 약자 배려에 능해야 했다. 하지만 약자 무시에 능했을 뿐이다.

리더십에서도 국가별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리고 개인별로도 차이가 날 것이다.

리더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고수 리더다. 또 다른 하나는 하수 리더다. 고수 리더와 하수 리더는 차이가 있다. 신재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하수는 직원들 ‘위’에 있고, 선수는 직원들 ‘앞’에 있으며, 고수는 직원들 ‘옆’에 있다.”

눈높이가 ‘위’인가? ‘앞’인가? ‘옆’인가?

여러분은 교회나 사회생활 속에서 어디에 있는가? ‘위’인가? ‘앞’인가? ‘옆’인가? 옆에 있어야 한다.

‘눈높이에 맞춘다’는 말이 있다. ‘옆’에 있는 사람이다. 옆에 눈높이 맞춰 주는 사람이 고수다.

하갈은 눈높이를 맞춰줄 줄 몰았다. 그러자 ‘위’에서 쳐다보기만 했다. 그 결과 무시하기만 했다.

그럼 사래는 눈높이가 ‘옆’에 있었는가? 아니다. 그녀도 ‘위’에 있었다.

5절에 모욕 받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아브라함에게 따진다. 결국 아브라함이 사래에게 하갈에 대한 권한을 주자 하갈을 학대했다.

사래도 하나님의 포로 의식을 갖고 살지 않았다. 또한 고수가 아니라 하수였다. ‘옆’에 있어야 했는데 ‘위’에 군림하려 했다.

하갈과 사래는 하나님 포로 의식이 아니라, 아마추어였다. 배려가 아니라 군림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란 배려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배려하는 것이다. 교인들을 서로 배려하는 것이다. 배려보다는 군림이 강하지 않은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서론에서 나는 기도 제목 중 하나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즉 ‘어떻게’에 할 것인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떻게 해야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할 수 있는가?

선진국처럼 배려를 잘해야 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한 뒤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에 대핸 배려다. 마스크 쓰기는 서로에 대한 최상의 배려다. 30초간 손 씻기도 서로에 대한 배려다.

그리스도인은 배려에 능해야 한다

배려에 능한 사회가 선진국이다. 배려에 능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한 번 물어야 한다. 나의 신앙생활은 배려의 신앙생활인가?

배려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하나님 배려다. 둘째, 교인에 대한 배려다. 셋째, 이웃 사람에게 대한 배려다. 이 중 어떤 것 하나도 덜 중요한 것이 없다. 셋 다 배려를 잘해야 한다.

세상은 배려가 중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즉 배려에 능한 사람이 돼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 때도 배려에 능해야 한다.

예배 시간 내에 참석하는 것은 하나님을 배려하는 것이다. 설교 말씀을 듣는 자세가 바른 것은 하나님과 설교자를 배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배려야 능해야 한다. 교회에서 갑질에 능한 사람도 꽤 있다. 한 교회에 오래 다닌 터줏대감은 보이지 않게 갑질을 한다. ‘난 초창기 멤버야!’, ‘난 교회 건축에 헌금을 얼마 했는지 알기나 해!’ ‘나는 직분이 집사야” 등등 많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반대여야 한다. 갑질보다는 배려에 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배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츠타야 서점과 우리나라의 교보문고

나는 해외에 가면 서점을 꼭 간다. 일본 도코에 갔을 때, 유명한 츠타야 서점에 간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이경미, 정은아가 쓴 《우리는 취향을 팝니다》에서 츠타야 서점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츠타야는 소비자의 취향을 배려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한다.”

제가 츠타야 서점을 가게 된 것은 이 말이 제 마음을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이 말은 소비자의 취향을 배려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형서점은 어떤가? 배려를 거의 하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그저 장사치라는 인상을 많이 받는다.

내가 자주 가는 교보문고는 소비자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하다. 소비자에게 너무 불친절하다. 직원이 자신의 일을 하는데 조금만 불편해도, 직원의 권리와 소비자의 의무를 말한다. 이런 이유로 저절로 교보문고에서 책 구입을 꺼려하게 된다. 그저 ‘아이 쇼핑’만 한다. 책 구입은 온라인으로 한다. 온라인으로 구입해도 교보가 아닌 다른 곳에서 구입한다.

서점은 소비자의 취향은 물론, 소비자의 편리함까지 배려함이 마땅하다. 아니 영업하는 곳은 고객을 최대한 배려하는 것이 기본이어야 한다.

츠타야 서점은 취향까지 배려한다. 하지만 일본이란 나라는 자신들이 압제했던 나라에 대한 배려가 없다. 우리니라가 강제징용 노동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판결로 내리자, 일본은 한국에 대해 경제 제재를 취했다. 이는 이웃 나라에 대한 배려가 아님은 물론, 침략에 대해 사과해야 하는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다.

일본은 선진국이 아니다. 마이크 비킹 (Meik Wiking)은 《리케(LYKKE)-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의 비밀》에서 이런 말을 한다. “행복의 가장 큰 장애물은 열등감 또는 배척감이다. 훌륭한 도시는 시민들이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다.”

앞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일본은 선진국이 아니다.

비킹은 또 한 마디 덧붙인다. “돈이 없는 사람들도 차를 몰고 다니는 나라가 선진국이 아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도 대중교통을 애용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우리는 좋은 차를 통해 부자를 과시한다.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인 덴마크는 차를 통해 부를 과시하지 않는다. 덴마크가 선진국인 것을 알 수 있다. 성경도 이렇게 말씀한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잠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 한다.

언젠가 외부 강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미나에서 강사에 대한 무례함만 있었지, 배려가 없었다. 그 때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는 그 단체에서 개최하는 세미나는 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

분명히 강의 주제는 “설교, 글쓰기다”였는데, 글쓰기 무용론이 주요 논지였다. 그 중 가장 듣기 힘든 말이 있었다. “글쓰기는 타고나야 한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말하려면, 주제를 바꿔야 했다. “설교는 성경 해석이다.”

약자에 배려를 잘 해야 한다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특히 약자를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강자를 배려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신재구 교수 말처럼 강자를 배려하는 것은 후진국의 특징일 뿐이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다. 그렇다면 배려의 품격을 높여야 한다. 특히, 약자에 대한 배려가 남달라야 한다.

외국 사람들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여 있다. 베트남 호치민에서 메콩강 투어를 할 때다. 그 때 여행객 중 한 분이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가족 몇 명도 함께 여행에 동반했다. 놀라운 것은 미국 가족 여행객이 휠체어를 탄 사람을 먼저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왔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서, 선진국이 뭔지 느끼는 좋은 경험을 했다. 그들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능했다.

교회는 약자 배려를 잘 하는 가?

교회는 어떤가? 교회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잘 하는가? 그렇지 않다. 강자에 대한 배려를 잘 한다. 강자를 만나면 자리를 양보한다.

약자를 만나면 양보라는 것이 없다. 도리어 양보를 은근히 요구한다. 가진 자가 교회를 쥐고 흔드는 것을 종종 본다. 이는 교회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낮춰야 높아진다

오늘 두 여인이 등장한다. 바로 하갈과 사래다. 두 여인 중 한 명인 사래는 약자였다. 원래는 사래가 주인이고 하갈이 종이었다. 임신 여부에 따라 주인과 종의 위치가 바뀌었다. 이는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려해야 했다. 그녀가 배려했다면 자기를 낮춤을 알 수 있다.

하갈이 자신의 임신을 알자, 여주인인 사래를 멸시했다(4절). 사래를 멸시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몰랐다는 증거였다. 그는 임신했어도 주인을 멸시하면 안 됐다. 자신을 낮춰야 했다. 임신하자마자 자신을 한 순간에 비정상적으로 높였다.

하갈은 낮춰야 높아지는 비결을 몰랐다. 그저 자신을 높이면 더 높아질 줄 알았다. 성경은 낮추면 높아진다고 말씀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자신이 높아지려면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낮춰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인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힘을 주는 인생‘과 ’힘을 빼는 인생‘이다. 힘을 주는 인생은 결국 자신이 잡초 뽑히듯이 뽑히게 된다. 그러므로 힘을 주는 인생이 아니라, 힘을 빼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럼 직장에서 직원을 선발하듯이 뽑히는 인생이 된다.

조금 힘이 있다고 자신을 높이면 안 된다. 높아질수록 낮아져야 한다. 익은 벼가 고객을 숙이지 않던가? 그러므로 높아지고자 한다면 먼저 낮아지려고 해야 한다.

낮추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

그럼 왜 낮춰야 하나? 낮춰야 높아지기 때문이다.

‘겸손이 미덕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겸손이 아름답다고 한다. 성경은 겸손이 존귀의 앞잡이라고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그리고 겸손하면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고 한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그럼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낮추라고 하셨다. 그럼 예수님께서 알아서 높이신다고 하신다. 그것이 마태복음 23장 12절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야고보 기자도 동일하게 말한다. 야고보서 4장 10절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낮춤에서 본받을 사람이 한 명 있다. 사도 바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엄청 낮췄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다.

우리는 자기를 낮추는 것을 힘들어한다. 자존심 상한다며 도리어 갑질을 선택한다. 신재구는 그의 책 《러더의 길》에서 갑질하는 사람은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불안한 리더는 나쁜 리더보다 더 나쁜, ‘나빠진 리더’가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을 높여 갑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자신을 낮추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교훈해준다.

하갈은 자신을 높인 후 갑질을 했다. 하갈이 자신을 높인 결과 결말이 어떻게 되었는가? 비참함으로 전락되었다. 곧 도망자가 되었다.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6절).”

낮추는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이어야 한다

그럼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는가? 당연한 것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져야 한다. 이는 감당하기가 어렵다. 기준을 할 수 있는 만큼 정하면 된다. “기준이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이어야 한다.”

자기 기준으로는 무조건 높아지려고 한다. ’더닝-크루거 효과‘라는 것이 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니, 주변의 능력 있는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이런 심리적인 것 때문이라도, 기준이 자신이면 안 된다. 기준이 상대방이어야 한다.

하나님 기준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이므로, 기준이 상대방이면 안 된다.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이 기준이 되면 후진국의 특징인 ‘강자’에게 약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강자에게 자신을 낮춘다. 하지만 약자에게는 자신을 높인다. 그리스도인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하다. 강자에 고개를 숙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기준은 하나님이어야 한다.

리더는 낮출 줄 알아야 한다

리더는 낮출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많은 리더들은 자신을 높이고자 한다. 자신을 높이면 아랫 사람이 힘들다. 로버트 서튼(Robert l, Sutten)교수는 그의 책 《좋은 상사, 나쁜 상사》에서 직원들이 조직을 떠나는 것은 조직이 싫어서가 아니라, 리더가 싫어서라고 했다.

한 마디로 재수 없는 리더 때문에 조직을 떠난다. 이는 리더가 자신을 낮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었다면 직원들이 떠나기는커녕, 평생 직장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낮추는 것을 힘들어한다. 우리 힘으로는 낮추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힘을 덧입어야 한다. 즉 낮춤의 본보기이신 예수님께 나아가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육의 몸으로 오셨다. 즉 성육신하셨다. 성육신은 낮춤의 절정이다. 그것이 빌립보서 2장 6-8절 말씀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들은 소크라테스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어 한다. 그 이유는 그가 한 말에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않은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존경한다. 그는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이다. 지금도 이만한 철학자를 찾기 힘들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만약 내가 소크라테스보다 뛰어나지 않다면, 저절로 자신을 낮춰야 한다. 소크라테스도 낮췄다면 우리는 당연히 낮춰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낮춰야 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밑바닥까지 낮추셨으므로 낮춰야 한다. 낮추지 않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하기 곤란하다.

하나님과 접속된 상태여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자신을 낮출 수 있는가? 나를 하나님과 접속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접속되어 있지 않을 때, 기회만 주어지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한다. 천사가 높아지려다 사단이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높아지려 하다가 타락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늘 접속된 상태여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접촉이다. 둘째, 접속이다.

인터넷 시대는 접속이 관건이다. 접속하려면 먼저 할 것이 꽂기다. 꽂아야 접속되기 때문이다. 접속되는 순간 충전된다.

신앙생활도 접속이 중요하다. 그런데 대부분 접촉한다. 만나서 스칠 뿐이다. 접촉하면 그 가치를 알 수 없다. 반드시 접속해야 한다. 하나님과 접속하면 진가가 나타난다. 그 진가는 삶에서 ‘여호와 닛시’를 위치게 된다.

인터넷과 접속되어야 정보화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과 접속되어야 참된 신앙을 할 수 있다.

복음은 2형식 동사다. 주어와 동사만 있으니까. “하나님이 하셨다.” 독서도 2형식이다. “내가 썼다”. 선물로 2형식이다. “하나님께 받았다”. 여기다 한 마디 덧붙여야 한다. “자신을 낮추라”.

우리는 자신을 최대한 낮추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자신을 낮춘다고, 낮춘 상태로 살아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높이신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자신을 낮춤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높이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모두가 되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독서‘꽝’에서 독서‘광’으로》,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자와 묵상/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이기는 독서/절판》,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