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시골 1960년대
▲1960년대 우리나라 농촌 모습.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고전 4:1-3)”.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사람의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판단을 더 의식하면서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라는 뜻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다름이 없다’는 뜻으로, 타인들의 판단에 집착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제 가을이 서서히 익어가고 있습니다.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지난 여름은 무더운 열기와 코로나19, 그리고 사나운 태풍과 홍수로 인해 망연자실하며 자금까지 애를 태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대로 운행되고, 또한 세상 끝나는 날 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밤하늘이 참으로 좋았고 아름다웠습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은하수의 자태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하늘에 펼쳐진 북두칠성과 유난히 자신을 나타내며 뽐내는 금성,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하나하나 별을 헤어 보면서 환한 미소로 깔깔대며, 달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겨운 옛 이야기로 마음을 뭉클하게 했던, 그 시절의 하늘이 그리움으로 내 마음을 가난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지금의 하늘은 그 시절의 하늘과 너무나 다릅니다. 어린 시절의 하늘은 언제나 고개만 들면 눈에 익은 하늘이었고, 초록에 빛나는 산과 들이었으며, 한 여름 깊은 밤에는 반딧불들의 청아한 노래는 더욱 자연의 신비를 일깨워줍니다.

높은 빌딩과 홍보로 세워진 간판 그리고 하늘을 가리는 장애물들로 인해 하늘을 두 눈뜨고도 볼 수 없는 이 시대가 어쩌면 탐욕으로 인한 부패한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시를 피해 공원이나 강변, 푸른 들판이나 언덕, 그리고 고요한 시골길을 따라가 보면, 언제나 푸른 하늘과 둥둥 떠가는 조각구름들을 볼 수 있었으며,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와 크고 작은 별들, 순이 목소리 같은 다정한 달빛을 눈에 담던 그때 그 시절의 찬란했던 하늘의 하모니가 그리움으로 젖어옵니다.

시계가 귀한 시절, 교회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서산에 해는 기울어 칠흑 같은 어두움이 밀려오면, 교회당에서 들여오는 차인 벨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평안의 안식으로 적셔주며 삶에 지치고 문드러진 마음에 큰 위안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각박하고 척박한 삶 안에서, 지친 마음으로 교회당 종소리와 차임벨 소리가 소음으로 들려 외면하는 시대에 이르러,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때 그 시절 교회당 종소리와 차임벨 찬양이 제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든 그 울림은 더욱 그리움으로 젖어옵니다.

그리고 이른 아침마다 대문 앞에서 대 빗자루로 옆집과 앞집, 뒷집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쓸며, 집집마다 시시콜콜한 얘기로 아침을 열며 행복해 했던 그 시절이 너무 눈에 선합니다.

지금 시대는 땅에 떨어진 휴지나 물건들을 주우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주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버리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길거리 쓰레기들을 수거했던 그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다보면 그 시절의 삶이 더욱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추운 엄동설한 하늘에서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제설작업에 함께 동참을 합니다. 자동차나 연로하신 어른들의 미끄럼 방지를 위해 솔선해서 눈을 치우는 작업을 하다 보면, 어느새 동네 아주머니들이 따뜻한 물이나 차를 끓여옵니다.

그 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그 시절의 인심은 마치 천국의 백성들과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시대는 자신의 편리를 위한 이기적인 사고와 행위가 가득합니다. 그 시절 풍성했던 인심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할 마음의 고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웃집에서 불행을 당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함께 불행을 근심하며, 도와줄 방법을 찾느라 밤새 눈물을 흘리며 함께 고난에 참여했던 그 모습들은 지금 시대와는 전혀 다른 세상임을 실감합니다.

이웃집에서 좋은 일들이 발생하면 함께 잔치에 참여하며 춤까지 추면서 기뻐했던 모습들은, 지금 시대의 ‘이웃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 속담처럼 시기와 모함으로 일관하며, 모르쇠로 외면해 버리는 이기적인 모습에서 더욱 ‘정’이 그리워집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웃들이 괴로워하고 아파할 때, 그들에게 다가가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며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에 관심을 갖고 함께 동참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보여주며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는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길거리에 쓰레기를 줍는 일을 비롯하여 남들이 하기 싫어하고 귀찮아하는 일들을 찾아, 우리 신앙인들은 그러한 일들을 해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신앙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분들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신앙인들은 정직했고, 이웃들이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곳에 스스로 찾아가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 고통을 분담하며 사랑했던 시절이었기에, 크리스천들을 보면 모두가 존경하고 좋아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세상은 교인들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손가락질, 혐오스런 표정으로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나 싶어 필자는 지금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 때 그 시절 신앙인들의 모습에서 그 답을 얻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정직한 신뢰와 나눔의 실천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나눔과 배려의 정신에는 고집과 교만, 그리고 탐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교회를 찾아와 자신들의 문제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신앙인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고, 각자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화장실 청소나 식당 설거지,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교회 뒷편에서 묵묵히 봉사하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신앙인들이 많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밖에서 남들을 의식해 눈가림으로 이웃 신앙인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 삼가야 하겠습니다.

일에는 작은 일, 큰 일이 따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굳건히 믿어야 합니다.

절대로 우리 생각과 판단으로 결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를 먼저 묻고 생각하며, 기도와 행위가 일치하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가을바람을 타고 살포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늘은 더 높고 더 푸릅니다. 다가올 엄동설한의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지금 이 순간 가을의 정겨움을 노래하며, 들판이나 언덕에서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열매들을 수확하며 감사하는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 속에서, 신앙인들은 깊은 가을의 감동 속으로 함께 참여하면서 ‘사라져가는 아름다운 그 시절’을 다시 회복하는 충성된 주님의 십자가 군병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