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아들 안에서 만나는 하나님

하나님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된 인간이 직접 접촉할 수 없다. 오직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하신 아들을 통해서만 접촉이 허용된다.

태양 가까이 근접하면 그 빛과 열기에 모든 것이 태워지듯, 죄인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그 ‘영광과 거룩의 빛’에 소멸돼버리기 때문이다.

시내산에서 40일간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에 드리워진 광채가 사람들의 눈을 부시게 하여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어야 할 정도였다면(출 34:29-30), 그 안에 하나님이 직접 거하셨던, 아니 그 자신이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은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웠겠는가?

물론 그의 영광의 광채가 ‘성육신’으로 가려져 사람들에게 완전히 현현되지 않았지만, 가끔 제대로 현현(顯現)됐을 땐 사람들이 감당하기 힘들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난 것(눅 9:29)”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의 발현(發顯)이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보셨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고 한 것도, 예수님 안에 내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고서이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접근이 불허됨은 ‘당신의 영광’과 ‘우리’를 보존하기 위해서다. 만일 하나님이 육체를 입지 않으셨다면 죄인들은 영원히 그를 접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는 말은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으로 인간들 속에 오셨다는 말이다. 아들의 육체를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요 2:21)”이라 하심도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말이다.

이쯤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성령이 성도 안’에 거하시는 것의 차이를 언급할 필요를 느낀다. 이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셨듯, ‘성령이 성도 안에 계시므로 그가 하나님이 된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다.

결론부터 말하면 ‘성령이 내재한다’ 해서 그가 하나님이 될 순 없다. ‘아들’ 안의 내재(immanence)가 ‘삼위일체적 내재’라면, ‘성도’ 안의 내재는 ‘비일체적 내재’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아무리 성도 안에 내재할지라도 성도와 일체를 이룰 수 없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성도’는 피조물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령의 내재’를 ‘인간 신격화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범신론(pantheism, 汎神論)’ 혹은 ‘신인합일(unification with god)’의 ‘신비주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 10:34-35)”이라는 말씀들을 자신들의 주장의 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아들(神子)이 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오직 그의 아들로 말씀하신다. 신적(divine, 神的)이시며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지자’와 ‘사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많은 물소리, 거문고 타는 소리(겔 43:2, 계 14:2), 우뢰, 천사의 소리’라며, 두려워 떨면서 더 이상 말씀하지 말 것을 호소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히 12:19).

인간은 자신의 가청권(可聽圈)을 넘어선 ‘하나님의 음성 주파수(sound frequency, 音聲周波數)’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청(可聽)의 한계를 넘어선 너무 ‘세미한 소리’도, 너무 ‘큰 소리’도 알아들지 못한다.

비유가 적절할진 모르나 동물에게는 동물의 언어를, 새와 곤충에게는 그것들의 언어를 써야 하듯,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씀하시려면 사람의 언어로 말씀해 주셔야 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의 말을 사람의 언어로 들려주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 1:2)”는 것은,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성자로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아들로’ 말씀하셔야 했던 또 한 이유는 그의 ‘영광의 위엄’ 때문이기도 하다.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히 7:26)” 하나님이 피조물, 죄인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가 없었다.

과거 왕정 시대, 왕이 백성에게 말할 때 직접 하지 않고 대언자(speaker, 代言者)를 통해 했듯,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은 모든 말씀을 하실 때 ‘아들’로 말씀하셨다. 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아들’로 말씀하셨다(요 1:1-3).

그의 백성들에게 말할 때도, 아들의 ‘성육신’ 전(前)엔 ‘선지자’를 하나님의 입으로 삼으셨다. 여기서 ‘선지자’ 역시 ‘아들’의 예표이며, 그리스도(아들)의 ‘3직(職) 중 하나’에 해당된다.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행 3:22).”

하나님은 오늘도 여전히 성경 말씀, 곧 아들(요 5:39)을 통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가 세우신 ‘설교자들’을 통해 ‘아들(예수)로 말씀’하시고, ‘아들을 통해 혹은 아들을 빙자해’ 말하심으로 ‘아들의 선지자직(a duty of prophet)’이 중단 없이 계속 수행되도록 하신다.

이는 ‘아들’을 말함으로 획득될 결과물에 대한 기대에서가 아니라, ‘아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다. ‘아들’을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구현되지 못한다.

또 하나님께서 ‘시내산 율법’으로 상징되는 ‘장엄한 하나님의 음성’을 더 이상 들려주지 않는 것이, 단지 그것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위엄찬 소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곧 ‘율법의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전적으로 무능한 죄인은 오직 ‘아들의 음성’만을 감당할 수 있고, 그것으로만 살아나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마 17:5)”,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그런데 오늘 강단에선 여전히 ‘아들의 음성’보다는 ‘시내산의 장엄한 소리’로 호유(曉喩)하니, 성도들이 혼비백산이다.

◈아들을 통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기독교에서 ‘생명’은 가장 많이 곡해되는 단어 중 하나다. 예컨대 ‘생명이신 예수를 믿어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가, ‘생명이신 예수께 연결되어 구원을 얻었다’는 식으로 단순 이해되곤 한다.

이는 ‘생명’이라는 ‘문자적 의미’에만 천착해 ‘그것’의 ‘행간적 의미’, 곧 예수의 ‘생명 됨의 실체’인 ‘그의 죽음’이 간과됨으로서 온 결과이다.

그것은 전선이 끊어져 작동이 멈춘 기계에 전선을 다시 연결하여 기계를 작동하듯, 죄인이 ‘생명이신 예수’께 ‘연결’되어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신 그의 ‘죽음’을 받아들여 생명을 얻는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 했을 때, 그 ‘생명’은 사실 ‘그의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를 믿어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대속의 죽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법적인 표현을 빌리면, 죄의 심판으로 죽은 자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 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는 말씀 역시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생명이 ‘아들의 죽음 생명(life for death)’에 있게 했으며, ‘아들의 죽음 생명’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의 죽음 생명’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뜻이다. 죄인은 오직 아들의 ‘대속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의 ‘대속의 죽음’ 없이 죄인이 직접 하나님의 생명에 접촉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하는 일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들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생명을 얻으려고 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