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정신과 신앙 이어가는 온라인 기도운동 동참자 모집
김 선교사 순교, ‘피의 세례’ 같은 새로운 부흥 불씨 될 것
의병 활동 중 일제에 참살당한 김동수 권사 3형제 떠올라

김진욱 선교사
▲김진욱 선교사의 터키 사역 모습.

지난해 터키에서 순교한 故 김진욱 선교사와 함께하는 기도운동이 그의 고향 강화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故 김진욱 선교사는 2019년 11월 20일 터키 남부 디아르바키르(Diyarbakır)에서 현지인들에게 매일같이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 신촌 아름다운교회(담임 이규 목사)에서 파송한 故 김 선교사는 강화도 출신이다.

‘순교자 김진욱 선교사와 함께하는 기도운동본부’는 회개와 각성을 통해 순교 정신과 신앙을 이어가기 위한 온라인 기도운동 동참자들도 모집하고 있다.

이들은 “김진욱 선교사의 선교와 삶이 고향인 강화도의 100년 전 기독교 역사와 놀랍게 닮아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진욱 선교사는 130년을 맞이한 강화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선교사로서는 첫 순교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진욱 선교사
▲김진욱 선교사의 터키 사역 모습.
故 김진욱 선교사는 지난 2016년 3월 터키로 파송됐다. 그는 강화소망감리교회에서 당시 김경식 목사에게 신앙훈련을 받았으며, 에벤에셀 찬양선교단 소속으로 강화 지역에서 활발하게 찬양 사역을 하기도 했다.

이후 청년시절 신촌 아름다운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시리아 난민들의 아픔을 나누고 섬기기 위해 동부 국경 지역 우르파에서 쿠르드족을 위한 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복음 전파를 위해 디야르바키르(Diyarbakir) 시에서 사역을 이어가던 중, 한 무슬림 소년에 의해 순교당했다.

운동본부 측은 “김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오늘날 ‘피의 세례’와 같은 새로운 부흥의 불씨가 될 것”이라며 “20세기 초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일어났던 강력한 영적 대각성 운동을 돌아보면서, 강화 지역 기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운동본부는 강화기독교연합회, 강화소망감리교회, 신촌 아름다운교회, KAMA(Kim jin-wook and Memorial Alliance) 등과 함께하고 있다. 이와 관련, 강화기독교연합회는 부활주일 연합예배를 강화소망감리교회에서 드리며 이를 위해 함께 기도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 사태로 잠정 중단했다.

이들은 “김진욱 선교사의 순교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 메시지가 되어, 무릎과 겸손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길 기대하며 김진욱 선교사의 순교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며 “코로나로 대면 사역이 어려워져, 김진욱 선교사와 그의 사역, 그리고 순교 이야기를 브로셔에 담아 강화도 내 교회와 목회자, 교우들에게 발송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진욱
▲기도운동본부에서 브로셔 배송 작업에 나선 모습.

운동본부는 강화도 기독교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100여 년 전 강화도 주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던 역사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기적적인 은혜였다”며 “김 선교사의 선교와 삶은, 100여 년 전 강화도에서 일어난 특별한 부흥운동의 원동력이 된 3명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정미의병운동을 거쳐 1907년 8월 구 한국 부대 해산령이 반포됐을 당시 이를 거부한 강화 진위대 병사들의 항일투쟁이 시작됐고, 그 배후에는 독립운동가 이동휘가 있었다.

강화 의병항쟁은 인천에서 파견된 일본군의 무력진압으로 거사 3일만에 끝났다. 일본군의 진압 과정에서 관련자들뿐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연행됐다.

연행된 이들 중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 3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친일활동을 하는 ‘일진회’를 규탄하는 일로 재판에 회부돼 그해 8월 21일 인천으로 가던 중, 더리미 해안에서 일본군에게 참살당했다.

이들 3형제의 희생은 강화 지역사회에 기독교(감리교)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을 확산시켰고, 이는 부흥으로 연결됐다. 당시 인천에서 강화도 선교를 지휘하던 미감리회 선교사 데밍(C. S. Deming, 한국이름 도이명)은 강화읍교회 김동수 권사와 두 동생의 희생을 ‘피의 세례(baptism of blood)’라 지칭하면서, 그것이 교회부흥의 원인이 되었다고 언급했다(강화기독교 역사연구 제5호, 이덕주 8쪽).

김진욱
▲강화 더리미 해안에 있는 김동수 권사 3형제 ‘순국터’ 비석 모습.

교회의 부흥은 ‘강제 합병’이 이뤄진 1910년 이후에도 계속됐다. 특히 매년 5월 열린 ‘마리산 부흥회’는 부흥의 원동력이었다. 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한 교인들은 마리산에 돌을 하나씩 들고 올라가 허물어진 참성단을 수축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다.

모든 생활이 억눌려 있던 일제시대, 마리산 부흥회는 오순절 성령체험의 ‘복음적 신앙’과 나라의 국권회복을 구하는 ‘민족적 신앙’이 어우러진 강화 특유의 신앙운동으로 자리잡았다(강화기독교 역사연구 제5호, 이덕주 9쪽).

운동본부는 “강화도의 폭발적인 선교 역사는 ‘피의 세례’라 명명했던 이들 3형제의 피 위에 세워진 것”이라며 “그 뒤로 100년 동안 강화와 한국의 기독교는 놀라운 성장을 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피의 세례’가 필요한 때”라고 역설했다.

김진욱
▲기도운동본부에서 제작한 브로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