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소포클레스 | 천병희 역 | 숲 | 575쪽 | 28,000원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선악과는 위험한 함정이 아니다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하셨다
자유, 올바른 선택 할 수 있는 힘

‘하나님은 선악과를 왜 만드셨나요?’

목회를 하다 보면 한 번쯤 만나게 되는 질문이다. 왜 굳이 선악과를 만들어서, 사람이 죄를 짓게 만드셨을까? 선악과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죄도 없고 아픔도 없을텐데.

이 질문에는 한 가지 오해가 있다. 선악과를 함정이라고 생각하는 오해다. 선악과는 위험한 함정이 아니다. 자유의 증거이다.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다는 증거가 선악과다.

그래서 선악과를 동산 가운데 두신다. 가장 잘 보이는 곳. 어디서든 선악과를 보면서,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셨다.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진 자유는 선악과를 먹을 자유가 아니다. 먹지 않을 자유다. 선악과는 먹고 죽으라고 만든 함정이 아니다.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증거다.

선악과 에덴동산
▲루카스 크라나흐의 작품 <에덴 동산>.
사람들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자유라고 생각한다. 틀렸다. 아이들의 가출은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다. 감정에 사로잡힌 결정이다. 자유는 내가 살아날 수 있는 결정을 하는 힘이다.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힘. 이것이 자유다.

고대 그리스 문학에서는 사람의 자유가 중요하지 않다. ‘운명’이 삶을 결정한다. 신이 결정한 ‘운명’을 사람이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희곡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이 신탁은 운명이다. 아무리 도망치고 발버둥쳐도 벗어나지 못한다. 운명에 얽매여 불행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소포클레스가 마지막 쓴 희곡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조금 다르다. <오이디푸스 왕>이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 이야기’라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주어진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이야기 흐름상 <오이디푸스 왕> 다음 이야기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서 추방된다. 자신의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떠돌이 신세가 된 오이디푸스.

부친 죽인 오이디푸스, 방황 시작
이번엔 두 아들이 왕권 두고 다퉈
예언 피하지 않고 맞서다 다 죽음

자기 나라에서도 추방당한 오이디푸스를 받아주는 도시는 없었다. 그렇게 안티고네와 함께 떠돌던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은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가 다스리는 곳이다.

이야기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콜로노스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지금까지 떠돌이 생활을 하던 오이디푸스. 그는 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에게 콜로노스에 머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오이디푸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테세우스는 그 부탁을 들어주었고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도 한다.

한편 테바이에 있던 오이디푸스의 막내 딸 이스메네가 콜로노스로 찾아온다. 그는 아버지와 언니 안티고네에게 테바이 소식을 알려준다.

테바이에서는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왕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다. 둘째 에테오클레스가 형 폴리네이케스의 왕위를 빼앗고 형을 테바이에서 추방해 버렸다. 추방당한 폴리네이케스는 아르고스로 망명을 가서 복수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에테오클레스 편에선 클레온이 오이디푸스를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신탁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의 무덤을 관리하게 될 사람이 왕이 될 것이다.” 이 신탁 때문에 오이디푸스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말한다.

이스메네의 말처럼 클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찾아온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두 아들이나 클레온, 그 누구도 따라갈 생각이 없다. 이전에 테바이에서 추방당했던 배신감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클레온의 제의를 거절하자, 클레온은 오이디푸스의 두 딸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테바이로 끌고 간다. 하지만 아테네 왕 테세우스의 도움으로 두 딸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다.

이후에 아르고스로 망명갔던 첫째 아들 폴리네이케스도 오이디푸스를 찾아온다. 용건은 역시 신탁 때문이다. 그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르고스의 군사를 빌려 테바이를 공격하려 한다. 승리를 위해 필요한 것은 신탁을 완성하는 것. 오이디푸스를 데려가야만 했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은 이번에도 거절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한다. 폴리네이케스가 테바이를 공격하면 두 아들 다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폴리네이케스는 신탁을 이루기 위해 오이디푸스를 설득하는 것도 실패했다. 게다가 전쟁을 일으키면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도 들었다. 그런 오빠의 모습을 보고 안티고네는 이렇게 말한다.

“군대를 되돌리세요. 오라버니 자신과 테바이를 파괴하지 마세요.”

폴리네이케스의 선택은 거절이다. “내가 이번에 포기한다면, 다음에 이런 군대를 지휘할 수 있겠느냐?” 살 수 있는 길을 두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안티고네는 다시 한 번 오빠를 설득한다. “두 분 오라버니가 서로 죽일 것이라는 아버지의 예언을 오라버니가 이루고 있다는 것도 보이지 않으세요?”

오빠가 선택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안티고네는 울면서 말한다. “예견된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오라버니를 보고 울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폴리네이케스는 왕권을 포기하지 못하고, 전쟁을 선택한다. 결국 두 형제는 그 전쟁에서 죽는다. 신탁의 내용처럼 오이디푸스의 무덤을 관리하지 못하게 된 두 형제는 왕이 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의 예언처럼 전쟁 속에 두 형제는 죽게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결국 신탁대로 되었고, 예언대로 되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 왕>과는 분명히 다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는 신탁을 피하기 위해 많은 선택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폴리네이케스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피하는 방법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살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죽음으로 가는 욕심을 선택했다.

반면 테세우스는 추방자 오이디푸스를 받아들였다. 모두가 외면할 때 받아들이기를 선택한 테세우스. 오이디푸스는 임종을 앞두고 자신의 무덤을 돌보는 자로 테세우스를 지명한다. 추방자를 받아들이고 보호해준 테세우스의 선택이 그를 행운으로 이끌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내버려두는 자유?
올바른 선택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
죄를 거절하고 바른 선택 할 수 있어

철학자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생은 B(Birth, 출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다. 정해진 운명을 따라 미래가 결정된 닫힌 삶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미래가 달라지는 열린 삶이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도 열린 결말이다. “돌이키지 않는 너희는 멸망할 것이다.” 심판을 말씀하시지만, 회복의 길이 열려있다. 니느웨의 멸망을 예언하신 하나님. 니느웨가 회개할 때 심판을 거두셨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사람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이루신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 그 계획 속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선택을 했고,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무덤을 예수님께 드리는 선택을 했다.

똑같은 신탁이 내려왔지만, 테세우스는 복 받는 길을 선택했고, 폴리네이케스는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 각자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것이 자유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진짜 자유는 아무거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진짜 자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다. 죄를 거절하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유! 복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박명수 목사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하나님 순종이 어려워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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