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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영원한 말씀의 로고스가 육신이 된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보이는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영원한 말씀의 로고스가 추상적으로 머물러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구체성을 의미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영원한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절)”.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육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존재의 변형을 의미합니다. 영원한 말씀이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육신이 되었습니다.

육신이라는 ‘사륵스’가 ‘에게네스토’, 즉 “육신을 입었다, 육신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육신이라는 사륵스는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도 포함한 온전한 인격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완전히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실로 가시성은 인간의 시선에 들어와 형태와 색채, 배경, 움직임 등에 의해 판단이 가능합니다. 이는 존재의 변화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존재의 변형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시각은 감각에서 70%를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감각 세계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比重)입니다. 영원한 말씀의 로고스를 알아볼 수 있도록 감각의 세계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고맙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가시성((可視性, visibility)은 인식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는 추상적인 영원한 말씀의 로고스가 구체적으로 몸을 입으셨다는 몸의 변형을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2. 영원한 말씀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 영원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 즉 사람을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14절은 영원한 말씀의 로고스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역사적인 순간의 장면이 지혜서 18:14-15절에 시적(詩的)으로 잘 묘사되었습니다.

“만상이 고요 속에 잠기고 밤은 달려서 그 한 허리에 다다랐을 때 주여, 전능하신 말씀이 하늘의 어좌(御座)에서 내리셨나이다.”.

이를 다시 풀어서 표현하면 “무거운 침묵이 온 세상을 덮고 밤이 깊어서 그 한 고비에 다다랐을 때에 하늘의 옥좌로부터 주님의 전능하신 말씀이 마치 멸망할 땅 가운데로 뛰어내려 왔나이다”입니다.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시간이 존재하는 인간의 역사, 현실의 세계로 들어오셨습니다. 저 멀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즉 현실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종교의 차별화를 의미하는 중요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을 신(神)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신격화(神格化)를 시도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신(神)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찾아왔다는 계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는 일이 불가능하지만, 신이 인간을 찾는 것은 가능합니다. 왜요, 신은 인간과 달라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전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이 인간을 찾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은 기적이면서 종교적 차원에서 묘한 대조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3. 영원한 말씀이 우리와 함께 살게 되었다

14절 말씀은 영원한 말씀의 로고스가 세상에 와서, 즉 인간의 현실로 들어와서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거하다’는 그리스어는 ‘에스케노센’인데, 이는 “장막을 치고 함께 산다”입니다. 우리는 어떤 부모가 아이를 낳기만 하고, 키우는 과정을 책임지지 않는 경우를 두고 무책임하다고 비난합니다. 어려운 세상에서 많은 고난을 이겨내면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동물의 세계’에서 가끔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중 아직은 더 자라나야할 어린 새끼를 남겨둔 채, 어미가 죽어 돌아오지 못한 경우입니다. 그 새끼가 생존의 위협 속에서 잘 자라날 수 있을까가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어려운 삶에서 “함께한다”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님은 태산준령의 동굴 속이나 육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바다에 위치한 외딴 섬이라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에 잠시 내렸다가 떠난 분이 아닙니다. 그저 불가사의한 미확인 비행물체라는 UFO같은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와서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살았던 나사렛 예수였습니다. 이는 우리와 함께 현실의 세계를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가는 인생의 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주님을 체험하게 하소서, 말씀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을 체험하게 하소서, 그리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하소서, 세상에 오신 주님을 체험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