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열기 태양 빛 깨달음 떨어져 명 대상 기대 안개 성 수도원 요새 고정 성령 충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법’으로,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롬 8:2)’으로 규정한다.

이는 ‘예수 안’에는 생명이, ‘율법 아래’는 죄와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고, ‘죽으려면’ 율법 아래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율법주의자들은 과거 유대인들이 그랬듯, 살겠다고 열심히 율법을 추종하므로 오히려 죽음에로 나아간다. 마치 늪에 빠진 자가 거기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치다 더 늪으로 빠져들듯, 율법의 저주를 벗어나려고 율법을 붙들다 더욱 율법에 빠져든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법’이라 함은 그 안에는 정죄하고 죽이는 율법의 효력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롬 8:2).”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사망(심판)의 화살을 맞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미치지 못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6-57).”

◈그리스도의 생명 성령

‘죄와 사망의 율법’을 이기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생명(life of redemption)’은 성령을 통해 택자에게 전가된다. 성령 없인 택자에게 그것이 전가될 수 없다.

이는 성령이 단지 ‘생명의 통로’ 역할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생명이신 ‘성령’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갖고 택자 안에 직접 들어가신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그의 ‘구속의 생명(life of redemption)’을 약속했고, ‘성령’은 약속된 그 ‘생명’을 갖고 택자 안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령이 파송되셨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딛 3:6)”.

‘그리스도의 죽음(구속)’을 받아들이는 자 안에 ‘성령’이 내주하기 시작하는 것은, 이러한 ‘구속’과 ‘성령’의 불가분리성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수납되는 곳엔 ‘성령’도 함께 계신다.

‘성령을 받는 것’은 오순절주의자들(Pentecostalists)의 주장처럼 ‘영적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을 수납하는 성도 모두에게 당연시된다.

역(逆)으로 오직 ‘성령’으로만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는 ‘신앙고백’이 가능하다는 점도 말하고자 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이 없는 자에게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아들일 ‘메커니즘(mechanism)’이 없기에, ‘길가의 마음(마 13:19)’처럼 ‘복음’이 그의 귓전(耳边)만 때리고 사라질 뿐이다.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그것을 던진 자를 찢어 상한다는 것은(마 7:6) ‘구속의 복음’을 이해할 메커니즘 인 ‘성령’이 없는 자들의 ‘복음 홀대’를 빗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구속의 복음’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은 내 안에 그것에 반응할 ‘성령이 내재’하시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안에 내주하는 ‘성령’이, ‘거듭난 내 영’과 더불어 복음에 반응하기 때문이다.

◈복음, 성령, 믿음

죄인이 ‘구속의 복음’을 들을 때, 성령이 그들 안에 ‘믿음’을 일으켜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믿음은 (복음을)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4, 17)”.

‘믿음’은 마음의 결단이나 신념의 산물도 아니고, 인위적으로 혹은 강요에 의해 사람 안에 주입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믿음’은 복음이 들려질 때,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택자 안에서 이뤄지는 ‘신적 역사(Divine works)’이다. ‘거룩한 믿음(유 1:20)’이라 함도 그것의 ‘신적인 기원(Divine origin)’을 두고 한 말이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갈 5:5)”라는 말씀 역시 믿음이‘성령의 역사’ 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단지 ‘믿음의 정의’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것과 연계된 ‘복음’, ‘성령’과의 ‘인과(因果) 메커니즘(causation mechanism)’ 속에서 성취되는 ‘구속의 경륜’까지 말하고자 한다.

예컨대 설교자가 ‘구속의 복음’을 말하면 거기에 ‘성령이 증거(evidence of the Holy Spirit)’가 따르고, 그 결과 청중(택자)에게서 ‘믿음과 구원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복음’, ‘성령’, ‘믿음’은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서로 ‘인과(因果)관계’를 형성하여 ‘구원 사건’을 발생시킨다.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진 ‘성령 수납(성령 받음, the receiving of the Holy Spirit)’ 역시 ‘셋의 인과관계’, 곧 ‘복음을 믿음’에 따른 결과이다. 실제로 성경은 ‘성령 수납’을 ‘믿음의 결과’로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복음을)듣고 믿음으로냐(갈 3:2)”,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 3:14)”.

이는 일견 ‘믿음’의 전제를 ‘성령’으로 규정한 ‘앞의 설정’과는 모순돼 보이나, 사실은 셋의 ‘인과관계의 메커니즘’을 달리 채용한 데서 온 결과이다.

이러한 ‘성령 수납(the receiving of the Holy Spirit)’의 원리를 기반으로 ‘성령 체험(experience of the holy spirit) 도식’이 산출할 수 있다. 곧, 설교자가 ‘믿음의 원천’인 ‘구속의 복음’을 전하면서, 청중들에게 ‘믿음을 의지하도록’ 할 때 그것이 공유된다.

‘성령 체험(experience of the holy spirit)’은 감정 도취도 분위기 산물도 아니고, 종교다원주의나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종교적 엑스타시(ecstasy)’ 같은 것도 아니다. 또 그것은 어떤 인위적인 ‘훈련’이나 ‘의식(儀式)’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령’은 언제나 ‘복음’, ‘믿음’과의 ‘인과(因果) 메커니즘(causation mechanism)’ 속에서 경험된다. 정상적인 ‘성령체험’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복음’, ‘믿음’과 인과(因果) 관계를 갖는다. 그것 없이는 ‘성령체험’도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복음을 들려 보내시면서 “숨을 내시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신 것은 오늘날 신비주의자들이 행하는 소위 ‘성령 시여(donation of the Holy Spirit)’의 원형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성령’이 부어질 것을 약조하신 것이다.

오늘도 ‘복음, 성령, 믿음’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복음’과 ‘믿음’을 의존하면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났던 ‘성령의 부으심(anointment of the Holy Spirit)’ 같은 것이 일어난다(행 10:42-45). 할렐루야!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