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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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서 11장 13-24절


운이 좋았기 때문 & 노력 때문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일본 기업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경영자는 마쓰시타 전기산업의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마쓰시타 고노스케회장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파나소닉’으로 알려진 회사가 바로 마스시타 전기산업입니다.

일본이 한창 호황을 누릴 때, 많은 젊은 인재들이 마쓰시타 전기에 입사하려고 했습니다. 이 회사는 마지막 면접을 할 때 회장이 직접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 질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신은 이 회사에 올 정도로 탁월하게 준비된 것이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자기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마쓰시타 회장은 이 문제에 대해 자기의 노력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은 모두 떨어뜨리고, 운이 좋았다고 답한 사람 중에서만 신입사원을 뽑았다고 합니다.

몇 년 후 이것을 눈치 챈 기자들이 그 이유에 대해 회장에게 물었습니다. 회장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말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이렇게 성공한 것이 내 힘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 덕분이라는 생각, 즉 다른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사람은 나중에 회사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도 긍정적인 자세로 문제를 극복해 나가곤 합니다. 반대로 자기 노력으로 되었다는 사람은 항상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섭섭한 마음으로 일을 해서 장기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마쓰시타 회장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운이 좋다”는 표현을 썼는데, 이 말을 기독교적 표현으로 바꾸면 “은혜를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모르는 사람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여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 있지만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아는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은혜다

‘별세신학’을 만드신 이중표 목사님 칼럼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살아계실 때 한 집사님 가정을 심방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보니 집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집사님 집이 참 좋습니다. 복도 많으시군요.” “이런 집이라도 장만한 것은 남편이 성실해서 그렇죠.” 목사님이 이번에는 거실 벽에 아들이 받은 온갖 상장과 상패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목사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아들이 공부를 참 잘하나 봅니다. 상을 많이 받았네요?” “예, 집안이 조상 적부터 영리한 혈통이라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 집사님이 외모도 빼어난 편이라 내친 김에 더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남편도 잘 만났지, 아들도 잘났지, 거기다 집사님은 인물도 고우시니 큰 복을 받았어요.” “저희 어머니의 고운 인물을 조금 받은 셈입니다.”

목사님께서 여러 가지의 칭찬의 말을 했지만, 목사님이 듣고 싶은 말이 집사님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예배가 끝나고 집사님은 다과를 내왔습니다.

다과가 나왔을 때, 목사님은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계셨습니다. 집사님은 “목사님 어서 드세요” 하고 계속 권유하는 데도 목사님은 먹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집사님은 목사님이 드시지도 않고 계속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그제 서야 무엇이 잘못되었나 싶어 안절부절 못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조용히 집사님에게 다시 말을 했습니다.

“참 좋은 집인데 사는 맛이 좋으시겠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죠. 좋은 신랑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구요.” “아들이 공부를 참 잘하는데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다.” “예 하나님의 은혜지요.”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이니 좋은 인물로 사는 것도 큰 복입니다.” “예, 목사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목사님은 그제 서야 집사님이 대접하는 다과를 감사한 마음으로 드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줄 알고 분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삶 가운데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오늘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은혜를 감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사연이 어떻게 되든 세상에 태어난 것이 은혜요, 오늘까지 살아온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생명, 나의 가족, 내가 가진 지식과 소유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세상을 보나 사람을 보나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 속에서도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로써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인다?

우리는 이방인들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 우리에게 복음의 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원받게 됐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이 구원에 이르게 된 것을 접붙이는 이야기로 설명을 합니다. 한 농부가 자기 밭에 아주 좋은 감람나무를 심고 잘 가꾸었습니다.

이 농부가 하루는 이 좋은 감람나무의 많은 가지들을 다 잘라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참 감람나무 줄기에다 돌 감람나무를 접붙였습니다. 그 돌 감람나무를 통해서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참 감람나무의 농부는 하나님이시고, 뿌리는 아브라함이요 감람나무는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인 우리를 가리킵니다. 그 중에 많은 가지를 잘라냈다는 말은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돌 감람나무는 원래 하나님이 버린 나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전혀 받지 못한 나무라는 말입니다. 결국 땔감밖에는 아무것으로도 사용할 수 없는 나무입니다.

이방인인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습니다. 버림받는 이방인인 우리가 이제는 아브라함을 통해 유대인에게 주기로 약속하셨던 신앙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말한 접붙이는 비유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치에 맞는 않는 비유입니다. 어느 농부가 자기 밭에 좋은 감람나무가 있는데 다 잘라 버리고, 그 위에 돌 감람나무를 접붙이겠습니까?

접붙이는 것에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울 사도가 말한 이 접붙이는 이야기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접붙이기를 하려면 돌 감람나무에서 가지를 잘라내고, 그 위에 좋은 감람나무가지를 접붙이는 게 상식입니다.

좋은 감람나무 가지를 잘라내고 돌 감람나무 가지를 그 위에 접붙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참 감람나무에 돌 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였다는 것은 좋은 감나무에 고염나무를 접 붙였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왜 바울은 이런 이치에 맞지 않는 비유를 했을까요?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행하셨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면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죄 많은 인간들의 생명을 살리시는 것,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참 감람나무 가지인 유대인들을 버리고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을 참 감람나무에 접붙여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나님께서는 돌 감람나무인 우리에게 너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당연히 지옥 가야 할 사람인데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으므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먼저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돌 감람나무이기 때문에 그냥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혀져야 합니다.

“네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롬 11:24)”.

우리가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옛사람의 속성을 청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곧 예수님 믿지 않고 살았던 과거와 완전한 단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

왜 많은 성도들이 오랫동안 예수를 믿지만 능력 있는 삶을 살지 못합니까? 옛사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원 돌 감람나무에 찍힘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새로운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지 못합니다. 옛사람을 찍어버려야만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고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잘라내고 이방인들을 접붙이시는 이유

왜 하나님께서는 참 감람나무 가지인 유대인들을 잘라내시고 돌 감람나무인 이방인들을 참 감람나무 가지에 접붙이시는 걸까요?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롬 11:20)”.

이 말씀은 보면 유대인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에 버림받았고 이방인인 우리는 믿음으로 섰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를 믿지 않고 누구를 믿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대인들은 믿지 않고 이방인 우리는 믿었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피를 받아 태어나기만 하면 아브라함의 씨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구원받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착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않은 유대인들은 잘라버리시고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는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을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잘려져 나와야 하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어야 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맞고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방인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

바울은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무슨 말씀입니까?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았지만 교만하지 말고 겸손 하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롬 11:21-22)”.

하나님께서는 원 가지인 유대인들도 가감하게 믿지 않음으로 잘라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접붙임을 받은 돌 감람나무 가지인 이방인들도 언제든 자릴 수 있음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곧 사랑 안에 머물라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입은 자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

은혜를 입은 자가 겸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아무리 많은 은혜를 누려도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거두어가시면 한 순간 다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건강, 물질, 자녀들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가지고 갈 수 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늘 겸손히 하나님을 잘 섬기며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는 공기다

은혜는 공기와 같습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공기 때문에 호흡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그냥 아무런 생각이 살아갑니다. 공기가 있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날마다 의식하지 않으면 나의 힘과 능력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현재 내 삶이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삶 속에서 생각하며 고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백성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면 교만해진다

사람이 왜 교만합니까?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바울은 충분히 교만할 이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습니까?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쓴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고 당한 고통을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자매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 벗었습니다(고후 11:23-27)”.

주님의 복음을 위해 이 정도 수고하였으면, 교만할 만도 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좀 교만하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바울은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늘 의식하며 살았기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저도 하나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날마다 저는 찬송가 305장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의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 하리라.”

이 찬양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을 작사한 사람은 존 뉴턴입니다. 존 뉴턴은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뱃사람으로 자랐습니다. 결국 그는 노예무역상이 됩니다.

그는 1748년 5월 10일 항해 도중 거대한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 거대한 폭풍 가운데에서 어려서 어머니를 통해서 들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회심을 하게 됩니다.

이후 존 뉴턴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제껏 해온 노예무역 일들에 대한 회개와 그 상황 가운데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하게 됩니다.

존 뉴턴은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술에 취한 사람, 탕자는 저에 비하면 죄인도 아닙니다. 저는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악으로 가장 높아지려는 야망과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의 형편없음보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입니다. 제가 과거에 노예무역상이였다는 사실과 그때 하나님이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제게 베푸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존 뉴턴은 날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고백하며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로 겸손히 사는 방법

은혜를 입은 자로 겸손하게 사는 것이 어떤 삶일까요? 그것은 그저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 갚을 수는 없을지라도, 이 땅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나누는 것입니다.

1992년 라트라비아 태생 유태계 첼리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던 미샤 마이스키가 예술의 전당에서 내한 공연을 한 후 사인회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신사가 “여기 9살 여자 아이가 연주한 테이프인데 한번 봐주세요.”라며 테이프를 건네주었습니다. 그 신사는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한나의 아버지였습니다.

마이스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가, 대만으로 가는 도중에 테이프가 궁금해서 테이프를 한 번 들어 보았습니다. 테이프를 듣고 난 후, 그는 장한나를 가르쳐 보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그는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본격적으로 장한나를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이스키는 장한나에게 위대한 연주자는 처음에는 손으로, 그 다음에는 머리로 그 다음에는 마음으로 연주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이스키는 평생 장한나 만을 유일한 제자로 삼고 가르쳤습니다. 한 푼의 레슨비도 받지 않았습니다.

장한나 양이 마이스키에게 “선생님, 이 은혜를 어떻게 갚습니까?”라고 했더니 마이스키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너도 누군가 재능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네가 가진 것들을 주어라. 나의 스승들도 나에게 그렇게 했단다.”

우리는 그저 받은 은혜를 그저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기가 잘난 맛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접붙힘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물질, 재능, 지식을 함께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재능 기부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할 프로그램입니다.

나누는 것은 말로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행동으로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나누라고 주신 것이지, 나만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 대한 이런 글이 있습니다.“바다는 모든 시냇물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바다이다. 바다는 세상에서 제일 큰 물이다. 그런데 또한 세상에서 제일 낮은 물이다. 큰 물이 되는 길은 가장 낮은 물이 되는 것이다.”

바다 같은 은혜를 받은 자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낮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겸손히 은혜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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