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 ‘변화 가능성’ 끝까지 믿은
예수님과 돈키호테의 ‘본질적 사랑’
차별금지법, 변화 가능성 혐오한다

맨 오브 라만차 뮤지컬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중 한 장면.
성경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와서 참 좋다. 성경 앱을 사용해서 찾아보니, 신구약을 통틀어 554개의 구절이 나온다. 사랑은 역시나 기독교의 정수다. 예수 그리스도의 강력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사랑은 쉽게 변질된다. 동성애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유통되는 것처럼.

동성애를 옹호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발의된 지난 6월 29일 이후, 소위 ‘지식인들’이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한 신학자는 “예수의 가장 중요한 핵심 메시지는 무조건적 사랑과 환대”라면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야말로 이웃 사랑법이라고 주장했다.

그네들은 공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을 향해 “사랑한다면 동성애자를 사랑하라”고 충고했다. 사랑의 방법도 제시했다. 동성애자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을 바꾸려 하지 말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있는 그대로 존중받고 싶어한다. 있는 그대로 인정받지 못할 때 분노하고 슬퍼한다. 신이 주신 본능이다. 기독교인들이 동성애자를 있는 그대로 용납해야 한다는 것은 천만번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들을 용납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두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수의 사랑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지만, 결코 있는 그대로 두지 않는다.

예수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돌팔매질에서 구해주신 요한복음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수는 그 여인을 사회에서 추방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용납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아라(요 8:11)”. 예수의 용납 목적은 분명했다. 변화를 위한 용납이었다. 사랑이었다.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역시 한 인간을 변화시키는 순수한 사랑을 예찬한다. 이 뮤지컬은 중세 기사와 매춘부 사이의 사랑을 다룬다.

매춘부인 여자 주인공의 이름은 알돈자. 그녀는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한 매춘부로 낙인찍혔다. 그녀가 매춘부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시인이자 기사인 남자 주인공 돈키호테만은 달랐다. 창녀의 내면에서 신성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는 거리의 여인들에게 흔했던 이름 ‘알돈자’ 대신에, 상류층 숙녀에게 어울리는 ‘둘시니아’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알돈자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미 그녀의 인생 깊숙이 매춘이라는 삶의 방식이 들어와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을 한낱 매춘부로만 여길 뿐, 변화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 그래도 돈키호테는 포기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조건 없는 사랑을 쏟아 붓는다. 마침내 그녀는 그의 사랑에 조금씩 응답한다.

그러나 지독한 삶의 관성이 다시 그녀를 사로잡는다. 그녀가 다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기 시작할 무렵, 돈키호테는 임종의 자리에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한다.

“절대로 잊지 말아라. 너의 이름은 둘시니아이다.”

매춘부 알돈자의 변화 가능성을 끝까지 믿는 돈키호테의 외침 앞에서, 모든 죄인들이 강력한 삶의 소망을 발견한다. ‘나 역시 지금의 모습이 끝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이 있다.’

기독교 사랑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 인간을 영원한 죄인으로 낙인찍지 않는다. 변화 가능성을 제시한다.

나는 동성애자들에게 동성애보다 나은 삶의 방식이 있다고 믿는다. 동성애는 실제 삶 속에서도 최고의 선택은 아닌 것 같다.

복음주의 최고의 지성 존 스토트가 저서 <존 스토트의 동성애 논쟁>에서 소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동성애 커플 156쌍 중 단 7쌍만이 성적 정절을 지키고 있었으며, 5년 이상 함께 산 100쌍 가운데 성적 정절을 지킨 경우는 단 한 쌍도 없었다.

이 연구 결과는 동성애 커플인 두 연구자가 조사하고 집필한 내용이다. 존 스토트는 말한다. “동성애 관계에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동성애자들은 언제고 불안정한 동성애 관계를 끝낼 자격을 가져야 한다. 그들은 예수의 사랑을 통해 원래의 창조 목적대로 변화된 삶을 꿈꿀 자격이 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더 나은 선택지가 있다는 말도 혐오로 규정돼 처벌 대상이 된다.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의 변화 가능성을 믿어주는 돈키호테를 잃을 것이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빼앗아 버리는 법을 사랑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농단 앞에 무기력하게 선, 그리스도인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에게서 변화가능성을 영원히 빼앗는 것이 진정한 사랑인가?

‘맨 오브 라만차’의 마지막 장면, 숨을 거둔 돈키호테 앞에서 알돈자는 말한다. “내 이름은 둘시니아에요.”

변화시키는 사랑이 있어서, 인생은 아름답다. 세상도 인생도 아름다움도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 돈키호테를 위하여, 둘시니아가 될 수 있는 알돈자를 위하여, 싸워야할 시간이다.

차반청 강유화
▲강유화 청년.
강유화
전 뉴데일리 기자
차별금지법 반대 청년연대(차반청) 회원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회원
리박스쿨 강사
dbghk102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