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빌립보서 4장 10-13절

테러 행복 긍정적인 쓰 괴로움 악 분위기 나쁜 파괴 침략 공격적 감정 공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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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별곡

한때 인터넷상에서 작자 미상의 ‘중산층 별곡(別曲)’이라는 글이 떠돌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적이 있습니다. 이 글은 중산층의 기준을 나라별로 비교를 해 놓았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중산층의 기준은 이렇습니다. “대출 없이 30평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 급여가 500만원 이상이고 2000cc급 중형차를 소유하고 은행 예금 잔고 1억원 이상이고 1년에 한 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

제가 볼 때 이 정도 되면 부유층에 속한 사람입니다. 물론 이것은 직장인들의 설문조사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부제를 부쳐놓았습니다.

그 다음 프랑스 중산층 기준은 이렇습니다.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은 1970년대 재임하셨던 퐁피두 대통령이 말한 기준이라고 합니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 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야 하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해야 한다.” 여기서 공분이란, 공적인 일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를 의미합니다.

다음 영국의 중산층 기준입니다. 영국의 중산층 기준은 옥스포드대학에서 제시한 기준이라고 합니다. “1. 페어플레이를 할 것 2.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3.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4.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5.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다음은 미국의 중산층 기준입니다. 미국 중산층 기준은 공립학교에서 직접 가르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며 그 외,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중산층의 기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좀 부끄럽지만, 우리나라가 수준이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습니다.

성공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그 자체로서 추구하는 가치는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행복이다. 돈, 권력, 명예 등 모든 것은 행복이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의하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행복에 있습니다. 전도서 6장 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전 6:6)”.

천 년의 갑절을 산다고 하면 2천 년을 산다는 것인데 2천 년을 살아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헛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공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으며 살아갑니다. 곧 돈과 권력과 명예를 행복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특별히 앞에서 중산층의 기준을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는 더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미국의 어느 조사기관에 따르면 어떤 일이든 3개월이 지나면 그 일은 우리의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려고 더 많은 돈을 벌려 하고, 더 강한 권력을 가지려고 하고, 남으로부터 더 대접을 받으려 하지만 결국 그런 일들이 행복을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16세기 세계최대의 나라였던 사라센 제국의 왕인 압둘라하만 3세는 39년 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다 누렸습니다.

1년 수입이 우리 돈으로 계산해 4,000억원에 이르렀고, 부인 3,321명, 아들만도 616명을 낳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의자왕은 3천 궁녀를 거느렸다고 하는데, 압둘라하만 3세는 그 보다 더한 왕이었습니다.

지금 이 왕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남자들은 “아 정말 부럽다”,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혹시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부귀영화를 다 누렸던 이 왕은 숨을 거둘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 영예로운 통치에도 불구하고 내가 진정으로 행복을 누린 날은 다만 14일밖에 없었다.”

이 왕의 마지막 말을 듣고도 이 왕처럼 살고 싶으신 분이 혹시 있으십니까?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렸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가진 것에 얼마나 만족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행복과 불행은 이른 아침에 결정된다고 해놓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참 잘 잤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루를 행복으로 출발하지만, ‘정말 피곤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루를 불행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불행이 지나가면 행복이 찾아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행복표’를 예약한 사람이고, 불행은 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불행의 번호표’를 든 사람이라고 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지금 주어진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삽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목사님 지금 나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미국 하버드대 한 연구팀이 ‘사이칼리지컬 사이언스’에 기고한 논문에 따르면 사람들은 부정적인 경험을 해도 그 상황에서 나름대로 가치를 찾고 만족감을 얻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좀 많이 다쳐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암환자들을 보았습니다. 죽을 날을 기다리는 암환자를 보면서 자신은 이만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위안을 얻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주변에 늘려 있는 모든 것들을 행복으로 해석합니다. 삶 가운데 행복을 하나 하나 발견합니다. 반면 다른 사람들이 보면 행복해 보이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늘 불만에 가득 찬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 사람들은 자신 보다 더 나은 사람들을 보면서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지지 못하고 더 누리지 못한 것으로 인해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족을 배우라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크게 기뻐한다고 하면 내게 능력주시는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앞에 나와 있는 말씀을 우리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12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로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절).”

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에 처해 있어도 그것을 대처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씀합니다. 곧 바울은 풍부하면 그것에 맞는 삶을 살고 궁핍하면 그것에 맞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두고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말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어떤 형편 가운데서도 그것에 맞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 그 능력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비결을 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할 수 있음이 비결이라고 말씀합니다. 곧 어떤 형편에 있든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그것에 만족하는 삶이 비결이라고 말씀합니다.

비교하면 행복할 수 없다

왜 행복은 비교하지 않는 것일까요? 비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미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중국 음식점에 가서 두 사람이 식사를 합니다. 한 사람은 짜장면이 먹고 싶어서 짜장면을 시키고 한 사람은 짬봉이 먹고 싶어서 짬뽕을 시킵니다.

시켜놓고 나면 어떻습니까? 짜장면을 시킨 사람의 눈에는 짬뽕이 더 맛있게 보입니다. 짬뽕을 시킨 사람의 눈에는 짜장면이 더 맛있게 보입니다. 만일 혼자 가서 짜장면이나 짬뽕을 시켰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의 심리 때문에 나온 것이 무엇입니까? 짬짜면입니다. 자신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떡이 항상 커 보입니다. 그러니 불평, 불만하게 되고 결국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이 어느 나라 대통령인지 아십니까? 우루과이의 무하카 대통령입니다. 무하카 대통령은 월급의 3분의 2는 기부를 하고, 3분의 1만으로 생활하는 농부 대통령입니다.

그는 42명의 비서와 수행원이 있는 대통령 궁을 노숙자 쉼터로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수행원을 포함한 4명만을 데리고 우루과이 수도 몬테 비데오의 외곽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대통령을 받들어 모시는 풍조를 없애기 위해, 그는 모든 노력을 다해 왔습니다. 그는 자기 명함이 아직 없습니다. 사람들은 한때 대통령이 언론과 방송을 의식한 제스처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은 누구나 그를 칭찬합니다. 그의 삶도 말 그대로 정말 진솔합니다.

그의 정치 이력을 좀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그는 오랜 독재와의 투쟁에서 6번이나 총을 맞고 감옥에서의 탈출과 붙잡힘을 반복하였습니다. 이후 장관을 지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에 된 후, 정치 이념이나 색깔보다는 국민의 행복에 관점을 두고 있습니다. 20년 이상 된 폭스바겐 승용차와 트랙터, 농장이 그의 재산 전부입니다. 아직 은행에 예금 통장 하나 없습니다. 가끔씩 농사를 지어 시장에 내다 파는 걸로 생활비를 보탭니다.

지금 우루과이는 그의 청빈한 삶으로 인해 관료들의 부패가 사라졌습니다. 매년 경제가 5% 이상씩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매년 국민 소득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한 번은 무하카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에 청중 중의 한 명이 그를 ‘라틴아메리카의 넬슨 만델라’라고 불렀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무하카 대통령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만델라는 메이저리그에 계셨으니, 나와는 노는 물이 다릅니다. 나는 그저 동네 아저씨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무하카 대통령은 사람이 사는 목적은 잘살기 위함보다는 행복함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과 다른 나라 대통령을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에서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은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다

솔직히 저도 사람인지라, 큰 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분들을 보면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특히 제 나이 또래 되시는 목사님들이 큰 교회를 목회하시고 잘 나가시는 것 보면 제 자신이 초라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평생을 섬기겠다고 헌신 저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세상 가운데 살아가시는 성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남들이 좋은 집에 좋은 차타고 다니는 것을 보면 부러우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같은 동기동창인데 잘 나가는 것 보면 주눅 들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해도, 그 생각을 붙잡지는 않습니다. 그 생각이 제 머리에 둥지를 틀지 않도록 생각을 전환시켜 버립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사역지가 없어 사역을 하고 싶어도 못하시고 설교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목사님들을 생각합니다.

개척교회에서 힘들게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을 생각합니다. 아직 임지가 없어서 부목사로 사역하는 있는 친구들을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사례비도 제대로 받지 못해서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목사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저의 삶 가운데 어렵고 힘들게 목회하는 때를 되돌아봅니다. 그러면 감사한 마음이 속에서 막 일어납니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제가 호강을 누려도 보통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교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에 올라가 있는 눈높이를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높이가 낮아지면 감사하게 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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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울려 버린 남자

‘여자를 울려 버린 남자’라는 글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연인이 결혼에 대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남자는 결혼을 위해 아파트를 준비하였고 여자는 새 아파트에 맞는 혼수품도 알아 놓았습니다.

그렇게 희망이 부풀어 결혼 준비를 하던 때, 여자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 해 회사의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그만 그 충격으로 여자의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결혼을 한 달 앞 둔 어느 날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아픈 고백을 하였습니다. 자기가 보여 주었던 새 아파트는 사실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여자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사실 새 아파트에 가져갈 혼수품을 살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그 말에 그렇게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렵게 단칸방에서 신혼산림을 차렸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남자의 월급이 결혼 전에 이야기하던 것보다 너무 작았습니다.

그래도 여자는 신혼의 행복에 젖어 기쁘게 살았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여자의 아버지도 건강을 얻고 다시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사업도 잘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이상하지요. 친정집이 어려울 때는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하였는데, 친정집의 형편이 좋아지면서 자기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혼 전 아파트를 보여주고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해 준다던 남편의 말이 모두 상처로 되살아났습니다.

그렇게 사랑스럽던 남편이 점점 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여자는 그 속상한 마음, 억울한 마음을 친정 어머니께 말씀드렸습니다. 아픔을 이야기하는 여자의 볼에서 아픈 눈물이 흘러내리고, 이야기를 듣는 여자의 어머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어머니는 딸에게 그동안 숨겨놓았던 비밀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사실은 김 서방이 아무 말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털어 놓아야겠구나.”

여자의 어머니가 해준 말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남자는 혼수용품을 해 올 형편이 못 되는 여자의 마음이 상할까봐, 신혼집으로 사 놓은 아파트를 팔아 여자의 아버지의 빚을 갚는데 보태었습니다. 그리고 남자의 매달 월급에서 적지 않은 돈을 여자의 아버지의 병원비로 사용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눈물은 조금 전 어머니가 흘렸던 감동의 눈물이었습니다.

남자는 얼마든지 자신이 여자보다 더 나은 형편에 있는 것으로, 여자와 비교하면서 자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유세를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남자의 목적은 내세우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능력 있는 남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남자의 목적은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더 가지려고 더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을 위해서 우리의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간의 행복을 위해 낮아지신 예수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얼마든지 그 자리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자리를 버려두시고 우리의 행복을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낮아지셨습니다.

낮아지신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물과 피를 십자가에서 다 쏟아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서 행하신 이 일을 인정하고 주님을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수님을 결국 더 높여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발 아래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낮아진 삶에는 늘 감사가 있다

스스로 눈높이를 낮추고 낮아지는 사람에게는 늘 감사가 있습니다. 그 감사로 인해 늘 행복한 삶을 삽니다. ‘감사하며 사십시오’라는 글을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지금 집에 전기가 들어온다면 감사하십시오. 세상에 전기의 혜택 없이 사는 사람들이 20억 명이 넘기 때문입니다. 집에 수도시설이 되어 있다며 감사하십시오. 그러지 못해 아무 물이나 마시는 사람들이 10억 명이 넘기 때문입니다.

하루 천원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천원 미만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려 12억 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루 한 끼라도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영양실조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지금도 8억 명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아침에 거뜬히 일어났다면 감사하십시오. 며칠을 넘기지 못할 사람들이 오늘도 백만 명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전쟁의 위험이나 수용소의 외로움과 굶주림의 쓰라림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감사하십시오. 지금 전쟁과 기아로 5억 명의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체포, 협박, 학대, 고문, 죽음의 두려움이 없이 교회에 나갈 수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이 땅에 아직도 30억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냉장고에 음식이 있고 당신의 몸에 맞는 옷이 있고 잠을 잘 수 있는 집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이 세상 사람들 75%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은행이나 지갑에 약간의 돈이 있고 어딘가 작은 접시에 동전을 모아 놓았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이 땅의 8%에 해당되는 부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시고 지금 혼자가 아니라면 더 감사하십시오. 보기드믄 행복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아직도 글을 읽지 못하고 성경을 한번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 20억 명이 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감사요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유지나라는 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의 조건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행복의 이유를 찾느라 지금 누려야 할 행복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 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이란 조건과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자신과는 비교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비교하지 않아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끊임없이 비교하며 살아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남들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가지고 우월의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제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해야 합니다. 1년 전의 나와 지금에 나와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1년 전의 나보다 지금의 나가 더 나은 나가 돼야 합니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나가 더 나은 나가 돼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아들과 같은 디모데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5).”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을 비교하며 더 성장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행복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행복한 사람의 눈에는 늘 행복만 보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행복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하나하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펜실베니아 대학 심리학과 길슨 교수의 이런 실험 보고가 있습니다. 실험자들로 하여금 구멍 두 개에 두 눈을 대고 상자 속을 들여다보게 했습니다. 상자 속에는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슬픈 얼굴이고, 하나는 기쁘고 밝은 얼굴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두 구멍을 통해서 보았음에도 의견이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슬픈 얼굴이 눈에 보이고, 어떤 사람은 기쁜 얼굴이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 연구를 통해 길슨 교수는 사람의 시각의 차이는 바로 그 사람의 마음의 차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연구조사에 의하면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태와 세상을 보는 태도에 따라서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슬픈 얼굴의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세상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자세로 보는 사람의 눈에는 기쁜 얼굴의 그림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행복이나 불행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조건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비교하지 않는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는 “설교를 만들어내기 힘들어 자괴감도 들고 목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김도인 목사를 대신해 목회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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