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피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다 죽음

하나님께로 가도 저주가 되고, 하나님을 피해도 저주가 되는 경우가 있다.

먼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경우이다. 죄인이 그리스도 없이 구원받으려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사실은 ‘구원자’가 아닌 ‘심판자’에게로 가는 것이고, 그 결말은 저주이다.

제사장이 완벽한 ‘정결 의식(purification, 淨潔儀式)’ 없이 하나님의 임재장소인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죽어 나온 것(레 16:4, 12-15)이나, 역시 ‘정결 의식’ 없이 웃사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하나님의 궤(the ark of God)를 만지다가 즉사한(대상 13:10) 사실은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은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도 그를 대면할 준비가 안 된 채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한 것이 되어, 하나님이 저주가 임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이 하나님을 대면해도 죽지 않는 유일한 곳을 준비하셨다. 그곳이 성전(출 25:22; 29:42)이었다. 거기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백성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리스도의 재림 때, 사람에 따라 그 날이 극과 극의 상반된 날이 될 것임도 같은 맥락이다. 구속(救贖)받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맞는 ‘구원의 날’이 되고, 구속받지 못한 죄인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림 때처럼 ‘죄인의 구주’로서가 아닌, 죄와 상관없이 ‘지엄하신 하나님’으로 오시기 때문이다(히 9:28).

둘째, 하나님을 못 만나 저주가 되는 경우이다. 이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다. 죄인이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을 떠나있는 그 자체가 죽음이고 저주이기 때문이다. ‘지옥 멸망’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이다(살후 1:8-9).

반면 ‘구원’은 죄로 하나님을 떠났던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감에 다름 아니다(행 26:18, 살전 1:9).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이다(요 14:6). 그리스도를 ‘화목제물이라(요일 4:10)’ 함은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켜 그에게로 돌이키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도모하는 일이고, 이미 언급했듯 그것은 죽기를 꾀하는 것이다. 오직 ‘아들’그리스도가 있는 곳에만 ‘아버지’가 계신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

◈죽음 생명(life for death) 그리스도

이미 언급했듯, 사망 아래 있는 죄인이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께로 가야 하지만, 준비 없이 생명의 하나님께로 나아가다간 오히려 죽음에 이른다. ‘살려다가 죽음’을 맞이하고, ‘생명이 죽음의 원흉’이 되는 역설이 이루어진다(역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모순돼 보이지만, 이것이 ‘죄인의 실상’이다. 죄로 죽은 인간은 ‘생명의 하나님’을 직접 대면할 수 없다. 구속받지 못한 죄인이 하나님을 대면할 때의 죄목(罪目)은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함이다.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시체에 닿으므로 부정케 되는 원리는(민 19:11) 인간에게 적용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께 적용된다. ‘죄로 죽은 인간’이 ‘생명의(살아계신) 하나님’을 접촉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함이고 거기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인간의 근원적인 죄는 여타의 그의 도덕적인 죄 이전에 먼저 ‘죄로 죽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한 죄이다.

따라서 죄인이 하나님께 나아가 생명을 얻으려면, 하나님과 직면해도 죽지 않을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그 안전장치가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죄인은 ‘자신의 의(義)’인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께 지불한 후 하나님을 대면해야 죽음을 보지 않는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의미가 ‘죽음’임을 시사한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말할 때는 언제나 ‘그의 죽음’을 염두에 둔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말이 생명이지, 사실은 ‘죽음을 위한 생명’이라는 뜻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생명은 다 ‘삶’을 지향하지만, 유일하게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죽음을 지향하는 ‘죽음 생명(life for death)’이다. 그는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벧후 2:12)”같이, 죽기 위해 탄생하셨다. 그가 ‘육체의 생명’을 취한 것은 그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열납될 참 죽음’을 죽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죽음을 위한 생명’이라는 의미의 ‘죽음 생명(life for death)’으로 명명할 수 있다. 이는 ‘죽음’과 ‘생명’을 동일시하는 허무주의자들의 ‘죽음 예찬’이나, ‘죽음’과 ‘생명’이 맞물고 돌아가는 불교의 ‘윤회적(輪回的) 생사’ 개념과 다르다.

죄인에게 ‘참 죽음’을 제공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케 하는 ‘죽음 생명(life for death)’이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 5:26)”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생명’과 ‘아들의 생명’을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의 생명’이 ‘원천으로서의 생명(the original life)’이라면, ‘아들의 생명’은 원천인 아버지의 생명에서 ‘발원된 생명(life derived from)’으로(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왔으면서도 둘이 ‘일체이며 동시에 독립적인’ 삼위일체 개념과 유사하다), ‘죽음’을 위한 생명이다.

곧 죄인에게 ‘아버지의 생명’을 주기 위한 ‘죽음 생명(life for death)’이다. 죄인은 ‘아버지의 생명’을 직접 취할 수 없기에, 오직 ‘율법의 의(義)’ 인‘아들의 죽음’을 통해 그것을 취하게 하셨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는 말씀은 ‘아들의 죽음’이 없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는 말이다.

다음 두 구절들은 ‘아들의 생명’이 ‘죽음 생명(life for death)’임을 보다 명확하게 해 준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요 6:51)”.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자신의 살(죽음)’을 준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죽음 생명(life for death)’임은 그의 탄생과 관련된 여러 성경 구절들에서도 확인된다. 그리스도 탄생시 동방박사들이 예물로 드린 ‘몰약(마 2:11)’은 장사(葬事) 물품으로(요19:39), 그의 ‘탄생(생명)’이 ‘죽음’을 위한 것임을 시사했다.

그의 공생애 시작 때 요단강에서 죽음을 상징하는 세례(물속에 수장됨)은 그의 사역의 지향이 ‘죽음’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 아들의 성육신(成肉身)’이 짐승 제물처럼 죽기 위함이었다(롬 8:3-4, 히 10:5-7)고 밝힌다. 죄인의 하나님께로의 돌이킴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존시켰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