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총장
성경에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다 들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민 14:28)”고 했다.

우리 말에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된다 된다 하면, 반드시 된다’는 것이다. 사람이 말을 하고 말이 사람을 만든다. 말을 할 때 제일 먼저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바로 발언자 자신이다. 이제 말과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를 예시해 보자.

슬픈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대부분 일찍 타계했다. 가수의 운명과 노래가사와는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신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은 장수하고, 고통, 이별, 슬픔, 죽음과 한탄의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단명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①우리나라 최초의 가수 윤심덕은 ‘사(死)의 찬미’를 불렀다가 그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②1960년대 말 ‘산장의 여인’을 부른 가수 권혜경은 가사처럼 자궁과 위장이 암에 걸렸고, 요양을 하며 재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녀는 산장에 집을 짓고 수도사처럼 쓸쓸히 살아갔다.

③‘수덕사의 여승’을 부른 가수 송춘희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불교 포교사로 지냈다. ④이난영은 ‘목포의 눈물’을 부르고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 병으로 49세에 세상을 떠났다.

⑤가수 양미란은 ‘흑점’이란 노래를 남기고 골수암으로 숨졌다. ⑥가수 박경애는 ‘향연’, ‘곡예사의 첫사랑’의 가사에 죽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울어봐도 소용없고, 후회해도 소용없다’가 그것이다. 50세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⑦‘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를 부른 박경희도 그 노래처럼 53세에 패혈증과 신장질환으로 별세했다. ⑧천재 작곡가라고 알려진 장덕은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를 부르고 요절했다. ⑨남인수는 ‘눈감아 드리리’를 마지막으로 부르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41세의 한창 나이에 노래말 가사처럼 일찍 눈을 감고 말았다.

⑩‘0시의 이별’을 부른 가수 배호는 0시에 세상을 떠났다.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그는 젊은 나이에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로 돌아갔다. 그는 ‘마지막 잎새’를 부르면서 그 자신이 마지막 잎새가 되었다.

⑪‘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고 ‘이름 모를 소녀’를 열창하던 선망의 가수 김정호는 20대 중반에 암으로 요절해 노랫말 가사처럼 정말로 가고 말았다. ⑫‘우울한 편지’를 부른 가수 유재하는 교통사고로 우울하게 사망했다.

⑬하수영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부르고 세상을 떠났다. ⑭가수 김광석은 ‘서른 즈음에’를 부르고 나서 바로 그 나이 즈음에 세상을 떠났다.

⑮‘이별’을 불렀던 대형가수 패티킴은 작곡가 길옥윤과 이별했으며 ⑯고려대 법대 출신 가수 김상희는 ‘멀리 있어도’를 부르면서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떨어져 살았다.

⑰가수 조미미는 35세까지 미혼이었는데, ‘바다가 육지라면’을 히트시키면서 재일교포가 바다를 건너와 결혼하게 되었다. ⑱오랫동안 노처녀로 지내다 ‘만남’을 부른 후 노사연은 이무송을 만나 결혼하게 됐다.

⑲‘세상은 요지경’을 불렀던 신신애는 사기를 당해 모든 것을 잃었다. 노랫말 그대로 ‘여기도 짜가(가짜), 저기도 짜가, 짜가(가짜)가 판을 친다’를 겪은 것이다. ⑳‘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를 불렀던 송대관은 한동안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노랫말대로 쨍하고 해 뜨는 날을 맞았다. 그의 첫 히트곡대로 세월이 약이 된 것이다.

가수가 노래 한 곡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는 같은 노래를 보통 수백, 수천 번을 부른다고 하는데, 이렇게 몰입해 반복하다 보면 부지중에 그 가사들이 내면화 또는 동화되면서 그의 생각도 생활도 운명도 영향을 받게 될 것 같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자기 자신이 노랫말의 주인공이 된듯하고 그것이 잠재의식이 되면서 그 노랫말에 적응하게 될 수 있다.

‘팔도강산’에 ‘잘 살고 못 사는 건 마음먹기에 달렸더라’가 새마을운동으로 연결됐고, 집단 신념이 된 것이다.

평소 밝고 즐겁고 희망찬 노래를 부르는 게 좋겠다. 말이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빌어먹을 놈’, ‘배고파 죽겠다’ 같은 말은 삼가하는게 좋겠다.

김형태 박사(한국교육자선교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