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1장 9-11절

빛 사람 록 키 실루엣 입구 지질학 동굴 탐험
▲저 멀리 빛이 보인다. ⓒ픽사베이
참 빛에 대해 입증하는 부분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참된 빛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빛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사실이 발생하게 됩니다. 당연히 알아봐야 할 사람이 알아보지 못했는가 하면, 알아보기 어려운 사람이 알아봤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배경을 중심으로 ‘세상에 오신 참 빛’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주님은 온 세상의 빛

주님은 생명체에 참된 빛이 된다는 뜻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9절)”.

참 빛이 되신 주님이 세상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온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것에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렇게 중요하신 주님이 몇 사람만을 위해 오셨다면, 어떻게 할 뻔했습니까.

그런데 다행히도 주님은 온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는 빛 되신 주님의 보편성입니다.

보편성을 사전에서 찾으면 ‘모든 것에 두루 통하거나 적용되는 특성’이라고 합니다. 이 보편성은 반대되는 특수성을 비교하면,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특수성이란 사물의 독특하고 두드러진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빗대어 말하면, 특수성이란 아무에게나 해당되지 않고 특수한 사람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보편성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를 꼽게 됩니다. 차별감이나 소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는 해당되고 누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그런 차별감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 보편성에는 소외감도 없습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얼마나 억울하고 서운하겠습니까?

그런 시각에서 이해하면, 주님은 몇몇 특수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빛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빛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온 세상의 빛’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2. 세상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연히 알아봐야 하는데, 알아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0절)”.

기대되는 가운데, 인식의 오류가 발생한 상황입니다.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는 <인식과 오류(Erkenntnis und Irrtum)>라는 책에서 “올바른 인식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결과에서만 가능하며, 잘못에 바탕을 둔 행동을 해서 곤란한 경우에 부딪히거나 불이익을 당하고 나서야 알게 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인식이란 우리의 단순한 감각기관으로만 되는 작용이 아닙니다.

의학에서 안면인식장애(prosopagnosia)가 있습니다. 안면인식장애란 시력장애나 시각장애가 없고, 이름대기 등 말하기장애가 없는 상태에서 사람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는 증상입니다.

그러면 안면인식장애도 아닌데, 세상에 오신 주님을 왜 알아보지 못했는가에 주목해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주님을 알아보려면 신체적인 감각을 넘어서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 작업이 선행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 반드시 정신적인, 더 나아가 영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세상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3. 그래도 주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1절)”.

이는 실로 인류 역사의 대역설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아이러니, 즉 역설이란 “자체의 주장이나 이론을 스스로 거역하는 논설”입니다.

쉽게 말하면 너무나 반대되어서 말이 안 되는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반어법은 아닙니다.

김소월의 “나 보기가 역겨워 거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는 실제로는 큰 슬픔으로 눈물을 펑펑 흘릴 것이라는 반어법이지요.

반면 유치환의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김영랑의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 등이 역설법의 예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진리는 대체로 역설로 표현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진리가 그만큼 심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설법과 반어법은 다르지요.

역설의 시각에서 생각하면, 인류 최대의 역설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는데,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백성이 영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의 부정의 영접이 부정으로 끝나지 않는 긍정을 암시하는 이유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세상에 온 주님을 자기 백성은 알아보지 못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이 알아봤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지만, 다른 백성은 영접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놀라운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택한 백성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되, 다른 민족이 알아볼 것이라는 역설의 의미입니다.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만큼 역설의 축복을 받은 행운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주님은 세상에 오신 참 빛이십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이 놀라운 사실을 받아들여서 축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주님은 온 세상의 빛이 되심을 깨닫게 하소서, 세상의 참된 빛으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게 하소서, 그리고 주님이 세상의 참 빛이 되심을 깨닫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세상의 참 빛이 되시는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