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하나님을 못 만나고(잠 1:28, 요 8:21), 하나님을 찾지 않은 자들이 하나님을 만난다고 했다(롬 10:20). 하나님은 숨바꼭질을 좋아하는 분이신가? 아니면 삐딱선(線)을 즐기시기 때문인가?

아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 신비가 담겨 있다. 이는 ‘인간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고전 1:21),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날 때만 알 수 있는 그의 ‘계시 방식’ 때문이다.

기독교 내에서 회자되는 ‘계시 신앙(Offenbarungsglaube, 啓示信仰)’이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 of God)’에 의존된 신앙을 일컬음이다.

‘생득적 종교성’, ‘인간 지혜’, ‘주술, 심령술, 제의’, ‘문화와 예술’로 신을 만나려는 종교다원주의, 철학, 신비주의, 뉴에이지(New Age) 등이 하나님 조우에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유대인들은 더 극적인 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지식’을 독점했던 사람들이고, 하나님께 극도의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19, 21).”

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음에도, 자신들의 성경 왜곡으로 예수가 아닌 다른 그리스도를 찾다 죄 가운데서 죽게 됐다는 뜻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여받은 모든 독점적 특권들을 다 무위로 돌리므로, 하나님 정보가 전혀 없었던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그들을 향해 ‘보고도 보지 못하는(마 13:13)’ 당달봉사(奉事)라 했을까.

이 점에선 차라리 왜곡시킬 하나님 정보가 없었던 ‘백지 상태의 이방인’이 더 유리했다. 이는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전도자들이 전해 준 복음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는 ‘하나님이 계시해주는 대로 그를 찾으면 만난다’는 뜻이지, 막무가내의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을 찾는다고 만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계시 신앙이란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듯, 소위 ‘어떤 특정 개인에게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나타내신다’ 는 ‘직통 계시(direct revelation)’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된 성경 계시’ 위에 세워진 신앙을 말한다.

이는 정통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었던 내용이다. 곧 “하나님이 ‘계시가 완성되기 전’엔 선지자나 사도들에게 환상, 음성 등으로 직접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성경의 정경화(正經化)’후엔 오직 성경을 통해 자신을 계시한다”는 뜻이다.

이후엔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경으로 가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다. 그러나 이는 ‘누구든 성경을 읽기만 하면 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성경을 탐독했으면서도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지독한 ‘성경 애독자’인 유대인들(요 5:39), ‘명민한(?) 지성으로 성경을 파고드는’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오직 성경’을 부르짖는 이단들이 그 생생한 예이다. ‘성경은 공개된 비밀’이라는 속담은 ‘성경은 누구에게나 열려졌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닫혀졌다’는 성경의 비의성(秘意性)을 말한 것이다.

이는 단지 ‘성경이 어렵다’는 뜻만도, ‘성경만으로는 하나님을 알기에 부족하다’는 뜻도 아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아는(구원받는)데는 ‘성경’으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성경의 비의성(secretability, 秘意性)’을 말하는 것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딤후 3:16, 벧후 1:21) 신적인 책(divine book)’이기에, ‘모국어 해득력’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divine word)이라는 증거’를 ‘성령으로만 해득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타당하다.

“성경 안에서 성경으로 말미암아 성경으로 더불어 신자들의 마음속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영의 증거로 인해서이다(요일 2:20, 27). … 이 증거와 성령의 가르치심이 없이 다른 모든 논증은 구원하는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해설서).”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성경)이 ‘삼위일체적인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진다’는 명제를 재확인한다. 비록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이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모국어(문자)’형식을 취했지만, ‘하나님의 비의성(divine secretability)’이 제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2위(二位)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음에도, 그를 증거해줄 또 다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3위(三位) 성령’의 증거가 필요했던(요 14:9, 마 16:17)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를 직접 대면했으면서도 그의 ‘하나님 됨’을 아는 이들이 별로 없었으며(마 16:14, 요 14:9), 오직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자만 예수를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다.“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유대인, 자유주의자, 이단들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그렇게 탐독했음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음은, 그들이 자신들의 지력(智力)에 근거한 ‘문자적·역사적 읽기’에만 몰두했고, ‘성령의 가르침’은 받지 못한 때문이다.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를 가르치시고 거룩한 뜻을 깨달아 예수를 알게 하소서(506장)’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지력(智力)’ 이상의 ‘성령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지 못할 때 율법은 ‘율법주의’의 근거로, 제사는 ‘제의(祭儀)’로, 예언서는 ‘신비주의적 묵시문학(默示文學)’으로, 시가서는 ‘문학 잡기(雜記) 혹은 삶의 지침서’로, 역사서는 다만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로 전락된다.

그러나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자에게는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의 책(요 1:45; 5:46)’이 된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 24:44)”.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열심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전 1:21)’ 죄인들에게는 ‘하나님 앎’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 of God)’에 의존되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 없인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죄인의 하나님 앎’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열심’을 요구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실제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열심’은 선지자, 전도자들을 부지런히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대하 36:15)”, “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렘 7:25)”.

그러나 악인들은 하나님이 ‘자기 계시’의 방편으로 보낸 선지자, 사도, 복음 전도자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그럼에도 그것이 하나님의 열심을 꺾지 못했다.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마 23:34-37)”.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열심에 빚지고 있다.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도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님의 자기 계시 곧 ‘복음 전도’를 통한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 계시(self-revelation, 自己啓示)’를 위해 동원한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성령’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며, 그 계시를 통해 택자가 하나님을 만난다.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 of God)’를 위해 파송받은 ‘성령’과 더불어, ‘복음’으로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곧 , ‘구원에의 초청’이며, 교회는 이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곳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