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본문: 에베소서 1장 1-6절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에베소서를 보겠습니다. 로마서와 에베소서, 두 권이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구원에 관한 고상한 지식을 하나는 깊이 들여다보게 하고, 다른 하나는 크게 관망(觀望)하게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카메라에 줌(zoom) 기능처럼, 하나는 줌 인(zoom in)이고 다른 하나는 줌 아웃(zoom out)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매우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읽는 이 성경도 이곳에서 편찬되었고, 바울이 선교 여정 가운데 가장 오래, 3년간 목회했던 곳입니다.

또 에베소서는 종교개혁자 루터나 칼빈 같은 사람들이 바울이 쓴 편지중 왕관과 같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진리에 관한 최고의 가르침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그 편지의 시작이 뭔가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1:1-2)”.

여기까지가 이 편지의 인사입니다. 그 시작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입니다. 내가 사도인데 그냥 어쩌다가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냥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도’는 apostolos. 원어는 함대 장수 같은 단어에서 나온 말이고, 뜻은 ‘보냄을 받은 자’ 입니다.

영어로는 앰버서더(ambassador), 대사와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 파송되어, 대통령의 전권을 위임받아 그 권한을 행사하는 자입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파송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파송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보냄받은 인생입니다.

에베소서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입니다. 에베소서 1장만 해도 표현을 달리해 이 표현이 10번 넘게 나옵니다. 매우 신비로운 말입니다.

지난 주 모임 때도 봤는데, 로마서 8장 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정말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 1:2)”.

바울의 편지에 늘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항상 은혜가 먼저 나옵니다. 은혜가 있으면 뭐가 따라나옵니까? 평강, 평화가 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수많은 분쟁과 갈등, 분열 속에서 살면서, 진정으로 갈구하는 세계는 무엇입니까. 평화와 평강입니다. 그 평화는 어떻게 오는 것입니까. 은혜로 말미암아서입니다. 이 단순한 말애 너무도 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인사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는데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6절에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2절에도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에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창조를 공부하면 이런 것을 배웁니다. 존재의 목적에 관하여, ‘나는 왜 사는가’는 매우 근원적인 질문입니다.

그 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를 왜 지으셨는가?’ 나를 창조하신 이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성경은 정말 놀라운 책입니다. 수많은 지혜자들이 찾아 헤매었던 물음에 대해, 너무 분명한 답을 줍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앞부분에서 ‘우리가 왜 사는가’, ‘우리가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합니다. 3절과 6절에서 ‘우리가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찬송’이 우리 존재 이유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찬송하며 살아야 할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찬송은 언제 나오게 됩니까. 우리는 왜 찬송합니까? 3절의 ‘찬송하라!’는 명령입니다. 찬송할 이유도, 노래할 이유도 없는데 노래하라고 하면 괴로운 일입니다.

옛날 군대에 가면 짓궂은 고참이 새로 들어온 신참에게 ‘너 노래 불러보라’고 시킵니다. 이게 ‘고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찬송할 이유, 노래할 이유가 너무도 충분히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설명은,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말을 더 깊게 풀어줍니다. 우리가 늘 찬송할 이유, 늘 노래하며 살아야 할 이유 말입니다.

이 말 속에는 우리가 ‘인상쓰지 말라’, ‘화내지 말라’, ‘불평하지 말라’, ‘짜증내지 말라’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겉으로 여러 모양의 힘든 일들과 괴로운 일들, 슬픈 일들이 있어도 속에는 그것을 다 삼켜내고도 남을 너무도 기쁘고 신이 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태평양에서 바람이 이리 저리 불때마다 바다 물결도 이리 저리 출렁이고 요란하지만, 깊숙한 바다 심해(深海)를 들어가 보면 너무 평화롭고 조용한 것과 같습니다. ‘찬송하라!’ 무엇 때문에 찬송해야 할까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 1:3)”.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복은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믿는 자들이 이것을 깨달으면 찬송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터져나온다는 것입니다. 그 복이 무엇일까요. ‘곧’이라는 말과 함께 자세히 설명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여기서 중요한 말은 ‘우리를 택하사’, ‘우리를 예정하사’입니다. 선택과 예정,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큰 교리 중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예정했습니다. 미리 다 결정해 놨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에서 요한 사도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다(10절)”.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유대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수많은 환란과 박해의 역사속에서도 멸절되지 아니하고 그것을 다 이기고 살아남는 백성들이 되었습니까? 왜 그렇게 강한 힘을 가졌습니까?

선민(選民), 즉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이 확신 때문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자기 안에 자리잡으면, 모든 어려움을 견디고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이지만, 바울의 자기 고백과도 같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창세 전에 나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들기도 전에 나를 생각하고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지으시고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셀 수도 없는 많은 변수들과 과정들이 있었지만, 그 전부터 나를 택하셨다고 합니다.

지나친 말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나를 향한 계획과 인도하심, 그 사랑의 깊이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십시오. 어쩌다 굴러온 호박처럼 이리 저리 치여 살다가 여기 온 것이 아닙니다. 너무도 세밀한 계획을 따라, 너무도 치밀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여기 있게 된 것이고, 이런 저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얼마나 나 한 사람이란 존재가 가치로운지를 말해줍니다.

지금 구원받은 자들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냥 예수 믿고 변화되어 살고 일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가령 바울의 회심 사건이나 이방인 고넬료 전도사건, 수많은 부르심의 사건들이 ‘예정’의 깊은 세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도, 모세라는 지도자를 길러 사용하시는데, 너무 긴 세월 하나님의 수고로운 손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장부터 보면 민족을 애굽에서 구하시려는데, 결국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 한 사람을 기르는데 얼마나 간절한 세계와 극적인 만남들과, 그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있습니까. 모든 순간 순간들이 기적입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오묘하고 세밀한 손길들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 이 모세가 나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면, 내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민족의 구원이라는 장대한 역사를 이루시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모든 미래를, 미리 다 정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미래를 미리 정해놓고, 모세와 그의 백성들을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예정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하는 세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가장 영광스런 미래를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 하나 이끌고 계십니다.

이 절대 예정의 신앙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신앙의 뿌리가 깊습니다. 그는 어떤 환란이 와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온갖 어려움이 다가와도 결국 예정하신 그 영광의 미래로 그를 데려다 놓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본문이 이와 같은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리 정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더 확장하면 29절부터 봐야 합니다.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그 아름다운 미래를 미리 정하시고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부르셔서 또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멸망당할 죄인들인데 그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다 깨끗케 하시고, 그래서 결국 무엇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영화롭게 하십니다. 시제가 완료형입니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광스런 미래를 벌써 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정해진 미래로 구원받은 자들을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예정’ 입니다. 그 예정은 꼭 이루시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해질 때, ‘토마스 선교사’라는 젊은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온갖 환란의 과정을 거쳐 배를 타고 이 땅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내리자마자 목이 베여서 죽게 됩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한스러운 일입니까? 와서 전도도 못하고 오자 마자 죽었으니까요.

그런데 죽을 때 성경을 내밀고 베임을 당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이걸 읽어 보라고 한 것입니다. 목 베인 사람이 ‘도대체 이게 뭐라고 내가 죽어도 이걸 보라고 하는건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이 종이니까, 하나 하나 찢어 자기 집에 벽지로 붙여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앉으나 서나 성경구절이 보여서, 집안에 있을 때면 계속 성경을 읽게 됩니다.

그러다가 성령의 역사로 회심하게 됩니다. 그런 역사들을 통해 복음이 이 나라와 민족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와 민족에 두신 계획이 있습니다. 예정하신 뜻이 있습니다. 마귀는 전도자들, 사명자들을 찌르고 베고 죽였지만, 그럼에도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에 두신 뜻은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막아도 막을 수 없는 역사였습니다. 요즘들어 더더욱 이런 메시지가 다가옵니다. Pandemic이 있고 정치적인 변화가 있어도, 하나님의 명확한 계획은 다 있습니다.

정해놓으신 뜻 그대로 역사는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 속에서 이런 예정이 우리 개개인안에도 다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이것은 앞서 읽은 로마서 8장 30절의 주석입니다.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들은 성화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갈수록 죄로부터 멀어지고 거룩해지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도 우리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거룩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흠이 없게 ‘하신다’고 합니다. 누가?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데려가십니까? glory. glorification ‘영화’입니다. 우리 인생의 영광, 영화는 무엇입니까? 최고로 아름답고 훌륭한 모습,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결국 죄로부터 깨끗한,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 아들입니다. 그 자리까지 우리를 변화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 복을 이미 우리 가운데 주셨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갈수록 거룩해지는 삶입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삶은 어떻습니까? 갈수록 죄가 쌓여가고 갈수록 파멸과 죽음에 이르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임한 복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즉, 기뻐하면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기뻐하면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때로 우리가 죄를 짓고 엉뚱한 삶을 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이 말 속에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가령 아이가 잘못하고 엉뚱한 짓을 해도 부모가 어떻습니까? 혼을 낼지라도, 마음 깊은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이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기르십니다.

그렇게 우리를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자기’가 누구입니까?

본문 속 전체 문장의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얼마나 큰 복이냐고 합니다. 아들에 관해 지난 모임에서 나눴습니다. ‘하나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엄청난 특권, 권한을 가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아들도 가지고 행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는 것입니다. 이 복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가득한 풀장 안에 첨벙첨벙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엡 1:6)’에서 ‘그’는 하나님입니다. ‘그가 사랑하시는 자’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공짜로 주시는 것입니다.

뭘 주십니까? 그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의 ‘은혜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를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믿음으로 은혜로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의인이 된 이후 영광(glory)에 이르기까지. 거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전 과정 속에 임하는, 그 모든 과정 속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온갖 복이 이미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복이 있습니다. 누구에게? 구원받은 우리에게, 예수 믿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노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평생, 언제나, 또 어디서나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새안교회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장시환 목사(서울 길음동 새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