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누가복음 18장 1-8절

산티아고 벼랑 끝에 서 있는 나무
▲3일을 더 걸어서 만난 해안가 벼랑 끝.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의 부르짖는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신 줄로 믿고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립니다”라고 기도했다. ⓒ예영 제공
국회의원의 특권 & 하나님 자녀의 특권

국회의원이 되면 200가지가 넘는 특권을 누린다고 합니다. 저도 그것을 다 찾아보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 중 몇 가지 만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국회의원은 회기 중에 현행범을 제외하고 불체포 특권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잡아갈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은 국유철도와 선박, 항공기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의원회관에 있는 사무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의정활동 지원을 위해 보좌관 7명과 2명을 인턴으로 채용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월급은 나라에서 줍니다. 국회의원은 의원회관에 있는 헬스장, 병원, 한의원, 약국 등의 다양한 시설을 다 무료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특권을 누리니, 많은 돈을 들여서라도 국회의원이 되려고 애를 써는 것 같습니다. 국회의원들이 누리는 특권이 부러우십니까?

하지만 국회의원이 누리는 특권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은 국회의원이 누릴 수 있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의 특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가장 큰 특권 중 하나가 바로 기도의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당히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습니다.

제가 부목사 시절 한 번은 권사님들과 심방을 가다 학교에서 하교를 하는 둘째 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의 이름을 부르자 웃으며 달려왔습니다.

둘째 아들이 제 앞에서 와서 가장 먼저 한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아빠 천원만.” 제가 그 돈을 줬겠습니까? 안 줬겠습니까? 물론 제가 준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권사님이 주셨습니다. 권사님이 주시지 않았다면, 당연히 제가 주었을 것입니다. 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제가 아빠이기 때문에 달려와서 인사도 없이 당당히 천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 아들이 저한테 돈을 맡겨 놓았습니까? 맡겨 놓은 것도 없는데 아빠라는 이유로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저는 제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요구를 들어줍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신 권리입니다.

기도는 파이프다

기도는 파이프와 같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아무리 많아도, 파이프를 통해 그 물이 논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으면 농부에게 저수지에 있는 물은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올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올 파이프가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올 수 있는 기도의 특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특별히 코로나 19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우리는 더더욱 기도의 특권을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님은 《끝에서 시작하는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기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는 절망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기도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않고 가능성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떠드는 사람은 많습니다. 책임을 떠넘기거나 희생양을 세워 공격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할 때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한국교회 가운데 여전히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거짓말쟁이일까요? 하나님은 거짓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쟁이가 아니라면, 문제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기도는 매어 달리기 시합이 아니다

우리는 나름 믿음으로 기도하다가도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 낙심합니다. 응답을 주시겠다고 하셨으면 빨리 주셔야 하는데, 응답의 시간이 지체될 때 낙심합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유교의 영향이 있어 그런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태도로 기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무조건 정성을 드리고 떼를 써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 정성을 드리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정성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필요를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때론 매어달려야 합니다.

하지만 기도는 매어 달리기 시합이 아닙니다. 많이 매어 달려 기도한다 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응답받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응답받을 때까지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과부와 재판장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과부와 고아는 가장 약한 자를 대표합니다. 어떤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불의한 재판장에게 그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불의한 재판장은 그 간청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과부가 번거롭게 계속 찾아오자, 과부의 원한을 풀어줬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비유를 접하면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과부처럼 하나님께 떼를 쓰고 귀찮게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귀찮아서 들어주시는구나.”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목적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이 비유는 기도에 대한 열심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곧 ‘얼마만큼 기도하면 응답을 받느냐?’는 말씀이 아니라, ‘얼마만큼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을 수 있는가?’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다고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며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언제까지 하는 것입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기도는 응답을 받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주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 어떤 응답을 주시든지 응답받을 때까지 해야 합니다.

인내하는 응답을 받는다

어느 회사에서 사원을 모집하는데 응모자들을 아침 9시에 모이라고 해 놓고, 12시, 1시, 2시, 3시가 되도록 무조건 기다리라고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지나갈수록 불평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 그냥 가버리는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오후 네 시가 되니, 거의 모두 불평하다 가버리고 몇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제서야 사람이 나오더니 지금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인내심을 인정해 모두 채용하겠다고 했습니다.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고 인내한 사람만이 채용되었습니다.

천국에는 되돌아온 소포가 많다는 이야기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면 응답의 소포를 준비하십니다. 물론 사람마다 소포를 받는 시간이 다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응답의 소포를 받기 전에 기도를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 소포는 다시 발신지인 천국으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의 소포를 받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정당한 번거로움이어야 한다

오늘 본문을 보면 5절과 7절 말씀이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5절에는 불의한 재판장이 등장하고, 7절에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5절에서의 대상은 과부이고 7절에서의 대상은 택하신 자들입니다.

대칭을 이루지만, 두 말씀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억울한 과부와 택한 자들이 각각 불의한 재판장과 하나님께 와서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고 요구하였고, 불의한 재판장과 하나님은 그 원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 주목해야 할 것은 불의한 재판장이 그냥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눅 18:2)”.

여기서 불의한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장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재판장이 힘없는 과부가 날마다 와서 번거롭게 원한을 풀어달라고 떼를 쓴다고 그것을 들어주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재판장은 자신을 번거롭게 하는 과부의 요구를 들어줍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과부의 요구가 정당한 번거로움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부의 요구가 정당하지 않았다면,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의 요구를 들어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과부를 감옥에 가두어 버렸을 것입니다.

결국 불의한 재판장에게 과부가 찾아오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는 이유는 찾아오는 횟수보다 물고 늘어지는 정당함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부의 요구가 정당한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찾아와도 번거로울 이유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는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녀들의 부르짖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원한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원한은 정당한 요구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도 그것이 정당한 요구일 때는 양심에 걸리는 법입니다. 하물며 사랑하는 자녀의 정당한 요구인 경우에는 어떠하겠습니까?

나의 기도가 정당한가를 확인하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어려움이 있을 때 많이 쓰는 방법 중 하나가 떼를 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당한 근거 없이 떼를 쓰는 것은 훨씬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자녀가 안 되는 것을 해달라고 떼를 쓸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저는 안 되는 것은 아무리 떼를 써도 해주지를 않았습니다.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고 나면, 다음에는 자녀가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먼저 우리의 기도를 들어달라고 떼를 쓰기 이전에 나의 기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한가를 살펴야 합니다.

조정민 목사님이 쓴 《왜 기도하는가?》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가 없고, 기도하지 않는 성도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고,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기도가 아니라면, ‘주여, 주여’ 아무리 소리 높여 부르짖은들 주님이 귀 기울이시겠습니까? 도무지 듣지 않으시고,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예수 이름에 합당한 기도를 하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기도할 때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으로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정욕을 따라 구해놓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나의 욕심대로 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내 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처럼 가식적인 기도를 드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마무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 이름의 합당한 기도를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침표를 찍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기도=하나님과 주파수 맞추기

기도는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는 것입니다. FM 라디오에서 대구 CBS 기독교 방송을 들으려고 하면, 103.1메가 헤르쯔를 맞추어야 합니다. 대구 극동방송을 들으려고 하면 91.9메가 헤르쯔를 맞추어야 합니다. 정확하게 주파수를 맞추지 않으면 잡음 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가 응답되기 위해서도 하나님과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기도한다고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에 주파수를 맞출 때 기도는 응답됩니다.

잠언 28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이 구절을 보면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정욕대로 기도하는 것은 가증한 기도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과 주파수가 맞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주파수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떼를 쓰고 부르짖어도 그 기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알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 기도를 하나님은 구하기 전에 이미 다 알고 계시고, 우리의 기도가 간절한 만큼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간절히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전 선배 되시는 김세범 목사님이 신명여자고등학교 교목으로 계실 때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목사님께서 학생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했습니다.

여러 학생들이 다양하게 하나님을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 중 가장 독특해 보이는 그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사람의 얼굴 모양을 크게 그리고, 이마에다가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그림을 그려 넣은 그림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그 그림을 그린 학생에게 그림에 대해 설명을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학생은 크게 그린 얼굴 모양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이마 속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곧 이 학생은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그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머릿속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만 그렇습니까? 부모 된 우리도 자녀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학교에서 운동회를 해도 다른 아이들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아이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앞에서 발표회를 해도 내 자녀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저희 큰 아들이 작년 10월에 군사훈련을 마치고 수료식을 할 때였습니다. 연병장에 똑같은 군인들이 서 있는데, 그 중에서 저를 비롯한 모든 부모들이 자신의 아들을 찾겠다고 난리입니다. 망원경까지 가지고 와서 찾는 자신의 아들을 찾는 부모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0)”.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실 뿐이 있으십니까?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이 놈아, 뱀이나 먹으라”고 던져주실 분 있으십니까? 아무리 악한 자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자식에는 좋은 것 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똑같습다. 아니 하나님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는데, 무엇인들 못주시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 여부에만 너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랑이, 이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만 있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의 응답을 주시던 감사할 수 있습니다. 비록 응답이 늦어지더라도, ‘NO’라고 응답을 하셔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

조정민 목사님은 앞서 말씀드렸던 《왜 기도하는가?》라는 책에서 또 이렇게 말합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까?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가 응답되지 않습니까?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이걸 달라고 하는데, 저걸 주십니까? 그것이 내게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최선의 것을 주십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데도, 그것이 왜 기쁨입니까? 우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실 수도 있고,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응답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라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마무리를 이렇게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알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도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주님의 결론입니다.

주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믿음 있는 자가 얼마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늘 마음속에서 새기고 나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기도는 매어달리기 시합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조건 떼를 쓰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당한 요구를 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합당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딜지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응답이 되지 않았을지라도 항상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믿음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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