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에 기여하고 한국전쟁도 겪으며
한국 사랑한 ‘인돈’, 4대손이 인요한 원장

인돈 윌리엄 린튼
▲추모 사진전을 감상하고 있다. ⓒ한남대

대전 한남대학교에서 설립위원장이며 초대 총장을 지냈고, 한국을 위해 평생 봉사의 삶을 살았던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 선교사의 서거 60주년을 맞아 지난 13일 추모 행사를 개최했다.

한남대는 이날 오전 10시 정성균선교관에서 ‘인돈 박사 60주기 추모예배’를 열고, 그의 업적과 ‘한국 사랑’, ‘학생 사랑’의 정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또 예배 후 교직원들은 인돈 박사가 과거에 생활했던 한남대 선교사촌(대전시 지정문화재) 인돈하우스를 방문, 그의 자취를 살펴보며 창학 이념을 되새겼다.

한남대는 최근 인돈하우스 내부를 새롭게 꾸며 인돈 박사의 교육 및 선교 활동과 일대기를 정리한 자료와 사진, 영상 등을 전시하고, 일반인에게도 공개하고 있다.

인돈 윌리엄 린튼
▲윌리엄 린튼(인돈) 초대 총장. ⓒ한남대

인돈은 미국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GE(제너럴 일렉트릭) 입사가 예정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으나, 이를 포기하고 1912년 21세 최연소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3.1운동을 도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찍어내는 등 독립운동에 동참했다.

이후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3.1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는 강연을 했다.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1937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다 학교는 폐교당했고, 1940년 미국으로 추방됐다.

그러나 인돈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한국에 다시 입국해 신흥학교를 재건하고, 일본 신사가 있던 자리에 공중화장실을 지은 일화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한국에 남았으며, 1956년 한남대의 전신인 대전기독학관을 세웠다. 3차례나 암 수술을 받으면서 한남대의 초대 총장으로서 대학의 기반을 다지는데 헌신했으며, 1960년 8월 13일 미국에서 치료를 받던 중 70세로 소천했다.

인돈 선교사는 201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과 인재양성, 사회정의 구현에 앞장선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인돈 윌리엄 린튼
▲이광섭 총장이 한남대 초기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한남대

인돈은 유진벨 선교사의 딸 샬럿(한국명 인사례)과 결혼해 4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지금도 4대에 걸쳐 후손들이 한국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북한의 결핵환자를 돕는 유진벨재단 인세반 회장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인요한 외국인진료소장은 인돈의 손자이다.

이광섭 한남대 총장은 추모사에서 “캠퍼스 곳곳에 새겨진 인돈 초대 총장님의 꿈과 비전은 우리와 후학들을 통해 더 큰 열매를 맺어나갈 것”이라며 “다시 한번 창학정신을 되새기면서 학생을 사랑하고 교육에 헌신하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