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마 15:21-22)”.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 15:26)”.

오늘 마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이 사는 땅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여인의 딸을 고쳐주시는데, 이 여인은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딸을 치유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으로 주위 여건을 상관하지 않고 주님을 향해 매우 큰 소리로 외칩니다.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족인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뿐만 아니라 “주님”이라는 호칭을 세 차례나 부르면서, 주님께서 들으실 때까지 계속해서 간절히 애원하는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의외로 이 상황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저 여자를 돌려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돌려보내소서라는 말은 고쳐주지 않고 쫓아내라는 의미의 말이 아니라 속히 고쳐서 보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로 가나안 여인은 소리 높여 계속 예수님께 애원을 한 모양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여인에게서 사랑하는 딸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는 절박함이, 우리에게도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 치고 절실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오늘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의 경우는 그 절박함이 하늘에까지 닿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존감 따위는 전혀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딸의 병 고침을 위해 가나안 여인은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찾아가 고쳐달라고 거듭 애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땅에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는 ‘강아지’에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런 굴욕적인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다시 한 번 애원했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하고 낮은 자세로, 딸의 생명을 위해 간절히 예수님께 간청한 것입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본인의 자존심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모멸감을 받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도 합니다.

가나안 여인이라고 왜 자존심이 없었을까요? 그렇지만 그녀에게 자존심 따위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딸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오직 주님만이 자신의 딸을 치유하고 구원해 주실 분임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에게는 딸의 치유가 절박했고, 간절히 기도하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면서도, 막무가내 식으로 청하지는 않았습니다. 슬기롭게 요청할 줄 아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나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겸손하게 기도할 줄 아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왜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셨을까요? 가나안 여인을 통해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시기 위해 그곳을 택하셨고, 가나안 여인의 치유를 통해 보람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치유를 체험한 가나안 여인 역시 매우 행복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병을 고치신 주님께서도 참으로 만족하며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어머니’란 상대를 끌어들이는 성질을 가진 단어입니다. 어머니는 비단 어린이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향한 자녀로서, 우리 믿음의 생활 또한 주님을 향한 우리의 고향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치유를 위해 소리치며 절규하는 그 믿음 속에, 하늘을 향한 애절한 기도가 들어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오늘날 무엇을 위해 절규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해 소리치며 달려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달려갈 곳은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아니라, 바로 주님이십니다. 나의 모든 혈기와 자존심을 팽개치고 깊은 겸손 가운데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열등감
▲ⓒDavid Marcu
또 다른 성경 속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열두 해라는 긴 세월 속에 당시 어떤 의사도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시달리면서, 있는 재산마저 모두 탕진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놓인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때마침 예수님의 기적적인 치유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사람들 틈에서도 자신의 체면을 개의치 않고, 많은 인파들을 밀쳐가며 예수님께 적극적으로 매달려 간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병 고침을 얻으리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사람들 틈을 마구 헤치며 절대적인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결과 여인은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 할지어다(막 5:34)”.

이 말씀을 듣는 여인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예수의 몸에 손을 댄 여인은 마치 도둑질을 한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주님께서는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음성을 들었을 때, 여인은 비로소 안심하며 구원을 경험하는 놀라운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그리고 모든 악한 것을 내버리고, 오롯이 주님을 향한 간절하고 절대적인 믿음으로 오늘날까지 우리 신앙인들에게 믿음의 본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간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막 5:23)”.

회당장 자녀의 손을 잡으신 예수님의 손은 “달리다굼“ 하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의 아람어로서,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어머니가 주로 사용하시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을 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아이를 깨우시며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 10:47-48)”.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느니라(막 10:52)”.

거지 맹인 바디매오 역시 앞을 보지 못한 처절한 아픔 속에, 치유 능력이 완전하신 주님께서 이곳을 지나간다고 하시는 말을 듣고 제자들의 제지에도 상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주님을 찾고 찾았습니다. 이후 주님을 만난 순간, 그는 자신의 목적을 성공리에 달성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십니다. 병 고침을 얻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은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오롯이 주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얼마나 다를까요? 지금 이 세상은 너무나 많은 생각을 갖고, 부정적인 의심의 눈초리와 이웃을 믿지 못하는 이기적인 잣대로 인한 믿음의 변질이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 시대에는 예수님 당시의 기적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증거”라고 일러주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매주 교회를 가지만,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진정한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상에 차려진 음식에만 마음을 빼앗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 주시는 참 평안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목자는 어린 양을 돌보는 일에 목숨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목자는 양들이 400-500명 떠나갔음에도, 자신의 탓으로 돌리기보다 성도들 탓으로 돌리는 안타까운 목자들도 있어 참으로 애가 마릅니다.

심지어 법정에서까지 사과를 하면 받아주겠다고 기회를 주었건만, 오히려 자신이 더 고소할 일이 많다면서, 아무 잘못이 없다고 세상 법정 앞에서 낯뜨겁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목자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될 분이구나!’하는 생각만이 하루종일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간절한 믿음으로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과 함께, 인정받는 이 땅의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