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햇살 산책 걸음 길 믿음
본문: 창세기 15장 1-6절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 성령, 예수님이 하나다.”
이 셋은 본질이 하나다. 이를 신학적으로 삼위일체라 한다. 기독교 교리 중 반드시 붙들어야 할 교리다. 다른 말로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교리중의 교리다.

한국인들에게도 삼위일체 교리가 있다. 한국인들이 만든 새로운 삼위일체의 교리다. 바로 ‘돈, 건강, 자식’이다. 부동산 구입에도 삼위일체가 있다. “첫째도 장소. 둘째도 장소, 셋째도 장소다.”

사람이 세상에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삼위일체가 있어야 한다. 다른 아닌 격려다. “첫째도 격려, 둘째도 격려, 셋째도 격려다.”

이 말은 맥 엔더슨과 톰 펠텐스테인이 말했다. 그들이 한 말이 있다.
“변화는 좋은 것이다. … 당신이 먼저 변화되라(charge is good. … you go first)”에서 ‘격려’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격려가 중요한 것은 격려를 받을 때 열정이 불타오르고, 그 열정으로 인해 변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격려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곳은 믿음이다. 첫째도 믿음, 둘째도 믿음, 셋째도 믿음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반응한다

‘믿음’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니, 믿음 하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기 전이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요구하신다. 바로 믿음이다. 그것이 15장 4절과 5절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4-5)”.

말도 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말씀이 주어지면, 사람들이 먼저 보이는 반응이 있다. ‘의심’이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일지라도 말이다. ‘과연 이루어질까?’ 라고 회의를 품는다.

이럴 때 더욱 더 우리가 보일 반응은 회의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어야 한다. 오늘 아브라함이 보인 반응은 믿음이었다. 그것이 6절이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할렐루야!

믿음으로 보이는 반응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신반의한 믿음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지라도 아브라함과 같은 기쁜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왕의 조서 앞에서도 믿음의 반응을 보였다. 당시 왕의 조서가 내려졌다. 왕 외에 다른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진다는 조서였다.

다니엘은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이는 왕의 조서를 어긴 것이다. 다니엘은 왕의 조서를 어기는 죄를 사자 굴에 던져졌다. 사자 굴에 던져졌지만 사자 밥이 되지 않았다. 몸조차 상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신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것이 다니엘서 6장 23절이다.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십자가에 죽어야 한다는 말씀에 보인 예수님의 반응도 믿음이었다. 믿음이 없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선택할 수 없다. 믿음이 있었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는 길을 선택하셨다.

예수님의 믿음은 허망함으로 끝나지 않았다. 찬양과 영광으로 끝났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3일 만에 부활로 이끄셨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인간의 생각대로 죽음으로 마치지 않았다. 부활과 영광으로 바뀌었다.

2019년 순천에 설교 글쓰기를 강의하러 갔다. 하루는 아내와 같이 갔다. 그 때 여수에서 반드시 해야 한다는 ‘해상 케이블카’를 탔다. 해상 케이블카는 바다 위에 매달려 있다. 케이블카를 타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케이블카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비행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비행기를 탈 때는,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는 믿음으로 탄다. 추락할 거라고 생각면 탈 수 없다.

비행기를 탈 때, 비행기보다 믿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는 믿음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비행기를 타자마자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한다.

최근에 2차에 걸쳐 회원들을 대상으로 논증세미나를 했다. 95%가 참석했다. 회원들이 귀중한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는 이유가 있다. 논증 세미나에 참여하면 설교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을 두고 줄타기 외교를 해야 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미국도 중국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70년 전에도 이런 말이 있었다.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마라, 일본 놈 일어나고 되놈(중국) 되(다시) 나온다.”

170년 전 국민들도 믿을 건 우리뿐이라고 했다. 그때 민요의 마지막 구절은 ‘조선 놈 조심하라’다. 조선 놈들은 외국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시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이 쇄국 정책을 폈다. 쇄국 정책은 다른 나라와 관계를 맺지 않고 문호를 굳게 닫아 서로 통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 소련, 일본, 중국 등 다른 나라를 믿을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믿을만한 한 분이 계시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오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는다. 그것은 1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기 때문이다(1절)”.

믿음이란, 하나님께 ‘박자 맞추기’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다른 나라는 못 믿어도,, 다른 사람은 믿을 수 없어도, 하나님은 믿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은 다른 말로 박자 맞추기이기 때문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친구 따라 박자 맞춰준다는 말이다. 신앙생활에서 믿음은 하나님과 영적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육적인 박자가 아니라 영적 박자를 맞추는 것이다. 영적 박자 맞추기는 믿음으로 반응하겠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박자 맞추기는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때도 맞춰주는 것을 말한다.

오늘도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생각이 달랐다. 아브라함은 엘리에셀로 상속자를 정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상속자를 준비해두셨다.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태어날 자인 이삭이라고 하신다.

이런 생뚱맞은 말을 쉽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달랐다. 쉽게 받아들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인 것은, 믿음이 하나님과 박자 맞추기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더 황당한 말씀을 하신다. 그것이 5절 말씀이다. “하늘을 바라보아라. 셀 수 있으면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네 자손들도 저 별들처럼 많아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도저히 박자를 맞출 수 없는 말씀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도 박자를 맞춘다. 대부분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보이는 반응은 엇박자다. “하나님께서 도셨나?”

어떤 친구가 제게 이런 말을 했다. ‘이번 주 로또 한 장 사라. 내 꿈에 너 로또 1등에 당첨될 거야.’

그때, 제가 한 말이 있다. ‘너 미쳤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아브라함이 할 말은 “하나님 미치셨나요?”였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은, 친구가 내게 로또 당첨된다고 한 말보다 더 황당한 말씀이다.

잠실역에는 로또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토요일이면 긴 줄을 선다. 로또를 구입하려는 것은 850만 분의 1에 해당되는 1등에 당첨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4절)”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즉 1%도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지금 사라는 임신을 할 수 없는 나이다. 아내 사라가 임신도 하지 않은 상태다. 아들도 낳을 수 없는 몸인데, 자손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많다고 하시니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는 가능하다. 아브라함은 자기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믿음은 하나님께 영적인 박자 맞추기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반응을 보이면 하나님께서도 반응을 보이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박자를 맞추어 주시니,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믿음에는 항상 반응이 있기 때문이다. 반응이 보여지기에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아주 중요시한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 11:1).”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누구는” 이런 말씀이 나온다. 5절에 “믿음으로 에녹은”, 7절에 “믿음으로 노아는”,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이라고 한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면, 반응이 뒤따른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인 하나님의 반응이 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면, 하나님께서 박자를 맞춰주신다. 오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박자 맞추니 하나님께서 보이신 반응이 있다.

그것이 6절이다.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 다른 말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옳다고 인정해주셨다고 한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이다.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행위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않게 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인정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인정을 최고로 여겨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정을 최고로 여겼다. 하나님께 맞추는 것을 원했다. 즉 하나님과 박자를 맞추고자 했다. 이는 자신이 원한 박자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박자를 맞추는 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박자 맞추기를 잘 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께 박자 맞추기다. 우리는 하나님께 박자 맞추기의 달인이 돼야 한다.

음악에서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을 ‘박치’라 한다. 저는 ‘음치’이자 ‘박치’다. 찬송을 부를 때 음정과 박자를 맞추지 못한다. 오래 전부터 불러왔던 것을 따라 부를 뿐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박치, 음치가 아니었다. 하나님께 박자를 딱딱 맞췄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며 살아야 한다.

세상에는 음치와 박치가 있다. 그리스도인도 음치와 박치가 있다. 바로 영적 음치와 박치다. 영적인 음치와 박치란 하나님께서 믿음을 요구하실 때, 자기의 의를 보여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원하시는데 복을 받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믿음의 박자를 맞췄다. 모두 다 하나님께 박자 맞추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정반대인 사람도 꽤 있다. 그 중 한 사람이 요나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지 않았다. 자기 생각에 박자를 맞췄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듣지 않았다. 도리어 다시스로 갔다.

요나만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지 않은 사람이 아니다. 가인도 요나와 같았다. 가인은 자기의 박자에 맞췄다. 자기의 박자를 맞추었기에 결국 동생 아벨을 죽였다.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은 처음엔 하나님 말씀에 박자를 맞추었다.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는 행진에서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었다. 그것이 민수기 9장 17절이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행진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다.”

바울도 다메섹 회심 전에는 자기에게 박자를 맞추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는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만약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지 않고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춰야 한다. 하나님께 박자를 맞출 때, 절망이 기회로 바뀐다. 낙담도 희망으로 바뀐다.

하나님 말씀에 박자를 맞추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가를 깊이 있게 묵상해야 한다. 십지가가 내 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최고로 하나님께 박자를 맞춘 사건이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이 세상에 오신 것보다는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신 것이다.

디오스 끼에레(Dios quiere)로 살아가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춰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박자를 맞추려면 ‘디오스 끼에레’,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면’이란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 말이 멕시코에서는 자기에게 박자를 맞춘다는 뜻이다.

멕시코는 ‘코리안 타임’과는 비교가 안 되도록 시간을 잘 지키지 않는단다. 그들은 1시간 늦는 것이 일상이란다. 23시간 늦는 일도 다반사란다.

늦지 말고 내일은 꼭 오전 10시까지 오라고 다짐을 받는단다. 그럼 아래와 같이 대답한다. ‘디오스 끼에레(Dios quiere)’. 이 말은 자신이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다는 ‘책임회피형’ 대답이다. 놀라운 건 멕시코에서는 자주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면 안 된다. 자기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10시에 약속했으면 10시 전에 도착해야 한다. 아니 10시 10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다.

우리는 멕시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이 살아야 한다. 어떤 목사님은 강의가 있으면 한 시간 전 도착을 목표로 한다. 저는 30분 전 도착을 목표로 한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기 위함이다.

예수님께 감정 전염이 돼라

‘감정 전염’이란 심리학 용어가 있다. 이 말은 ‘남들과 똑같이 행동하고 싶어하거나 행동하게 되는 상태’를 일컫는다. 우리는 예수님께 감정 전염이 돼야 한다. 예수께 감정 전염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박자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류쉬안의 책 《심리학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이야》에 보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 당신의 삶에 다가서며 “이봐, 나 여기 있어!” 라고 외치는 사람, 둘째, 당신의 삶에 다가서며 ”아, 너 여기 있었구나!“라고 가볍게 감탄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감탄하며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께 맞춘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감탄하시도록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박자를 맞추려면, 먼저 할 일이 있다. 나의 신앙과 삶의 음정과 박자를 조율해야 한다. 그 박자 조율은 내 생각을 내려놓음으로 시작된다. 기준점을 하나님으로 이동이 필수적이다.

기준점을 하나님으로 이동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신다. 하나님과 박자를 맞춘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부어주신다.

오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진짜가 아닌 가짜를 자기 아들로 확정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짜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다마스커스 사람인 엘리에셀에게 상속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몸에서 후사가 태어난다고 말씀하신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겠다고 하신다. 가짜 상속자가 아니라 진짜 상속자를 주시겠다고 하신다.

믿음은 하나님 말씀에 박자 맞추기다. 하나님 말씀에 박자를 맞출 때,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뀐다. 가짜가 진짜로 변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박자를 맞췄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춰야 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 이후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박자를 맞추길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독서‘꽝’에서 독서‘광’으로》,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자와 묵상/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이기는 독서/절판》,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