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들 잣대로 친일 적폐로 규정? 비역사적 무지
함께 이룩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허무는 처사
친일 문제, 해방 직후 고려·반성했던 당연한 과제

광복 75주년을 맞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친일 문제에 대하여 합동신대 교수를 역임하신 기독 사학자 김영재 박사님이 보내오신 특별기고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오늘날 새삼스럽게 거론되는 과거 일제강점기 친일 문제에 대한 생각을 대충 정리해 보려 한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38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북을 장악한 공산 정권은 계급투쟁의 사관에 따라 국민을 유산자와 무산자로 구분하고 유산자의 재산은 몰수하여 국유화했다.

유산자는 무산자들의 적으로 규정되어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계층으로, 압제와 숙청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지주, 친일파, 지식인, 기독 신자를 비롯한 공산주의 사상에 반대하거나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 다 유산자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북에서는 친일파 청산도 혁명적으로 수행된 셈이었다. 북에서 살기 어렵게 된 사람들은 월남하게 되었고, 6.25 전쟁 중 1.4 후퇴 때 많은 이들이 남으로 피난하였다.

1953년 6월 정전을 하게 되었을 때였다. 북괴군 포로들 중 무려 3만 5천 명의 많은 이들이 귀향을 포기하고 남한에 남기를 원했다. 그들은 공산주의 치하의 삶이 싫어서, 무작정 남한에서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UN의 포로협정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그리고 전쟁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을 존립의 위기에서 구해 준 미국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포로 석방을 감행했다.

수백 만을 헤아리는 사람들의 월남과 반공 포로들의 선택과 이들을 석방한 이승만의 과감한 조치는 자유민주주의의 귀중함을 재평가하게 해 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1948년 UN 감시 하에 구성된 제헌 국회와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수립했다. 이승만은 때로는 독재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개헌을 강행함으로써 대통령 직선제를 확립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를 공고히 했다.

해방 후 남한에서도 친일파를 색출하는 반민족특위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했으나, 결말을 보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국내 정치적 기반이 없는 이승만이 소위 친일파였던 사회 계층을 포용하여 정치 세력을 키웠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영화 강철비
▲한미 관계를 중시했지만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 포로를 석방했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그런데 지금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일 뿐 아니라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세계관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에 부역하거나 친일 행각을 한 사람들도 국민으로서 포용한 것이라고 본다.

8월 4일자 미주 발행 조선일보에 원로 언론인 인보길 씨가 쓴 책을 소개하면서 쓴 글에서 보았다. 4.19 때 이승만 대통령이 병원에 부상당한 학생들을 방문한 자리에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고 했다고 한다.

일주일 후 4월 26일에 그는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장제스 대만 총통의 위로 전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나는 위로받을 이유가 한 가지도 없소. 불의를 보고 일어서는 똑똑한 젊은이들과 국민을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한이 없소.”

이승만은 일본을 싫어하고 미국에서 일본의 불의함을 고발한 사람이지만, 친일한 사람들이라도 다 우리의 동포이므로 포용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인이요,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므로, 그리고 평생을 독립운동을 해 온 사람이므로 친일파를 포용할 아량과 자격을 갖춘 이였다.

친일한 사람들도 광복을 되찾은 대한민국에서 살아야 하고, 새롭게 나라를 세워 가야할 국민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이 지식인이요,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이들이어서, 광복을 맞이한 조국을 위해 이바지할 사람들이었다.

친일한 이들이 계급투쟁과 혁명을 끝없이 외치며 숙청을 일삼고 강압과 통제로 인민을 다스리는 북의 공산 정권 아래서는 숙청되었으나, 자유민주주의 남한에서는 그들의 과거 행적을 탕감 받은 셈이다.

그래서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운 광복군 지도자 이범석 장군이나 일본 군관학교를 나온 백선엽이나 박정희가 다 함께 대한민국 국군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을 비롯한 많은 일본 통들의 지도력과 남한에 기반을 가진 사업가들, 월남하여 자수성가한 사업가들의 창의적인 노력과 잘 살아보자고 땀 흘려 노력한 온 국민의 호응과 화답으로, 대한민국은 최빈국에서 세계 정상의 나라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다.

일제는 1910년 우리나라를 병탄한 이후부터 줄곧 우리 민족을 차별하고 탄압해 왔으나, 1919년 독립만세 운동 이후, 그리고 일본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 1930년대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우리 민족에 대한 압제의 강도를 점점 더 높였다.

학교나 관청에서는 일어만 해야 하고, 온 국민이 성씨도 일본 이름으로 바꾸어야 했다. 대다수 국민들이 수모와 불이익을 견디고 굴종하며 살았지만 소수의 애국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했으며, 국내에서 이들을 후원했다.

그들은 자랑스럽고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이들이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독립유공자로 그들을 기념하며 그의 자손들을 찾아 포상해 왔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을 때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반대했으나 다들 신사에 절함으로 굴종했듯,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지도적인 인물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 말엽에 이르러 일제에 굴종하거나, 심지어 친일 행각을 하게 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 친일파라고 매도되고 있지만, 어쨌든 그것도 애석하고 슬픈 우리의 역사의 한 부분이다.

해방을 맞이한 지 7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 세대 사람들이 일제의 멍에 아래 신음하며 살던 조상들을, 그리고 해방된 조국에 크게 공헌하면서 함께 살아온 선배들 중 어떤 이들을 자기들 나름의 잣대로 친일파로 규정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폄훼하거나 적폐로 규정하는 것은 비역사적인 무지한 소행이다.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을 이룩하는 대들보로 혹은 기둥과 벽을 쌓는 돌로 함께 살아오고 이바지해 온 요소들을 골라 제거하자는 것이나 같다. 북의 끊임없는 도발과 위협 아래 좌우 갈등, 6.25 동란, 군사 독재와 민주화 운동 등 수없이 많은 희생과 봉사와 인고의 과정을 겪으면서 모두 함께 이룩해 낸 자랑스러운 국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허무는 처사이다.

친일 문제는 해방 직후의 역사적 시점에서 충분히 고려하고 반성해야 할 당연한 과제였다. 북의 공산정권은 친일 문제를 숙청으로 결말지었고, 남의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화합과 상생으로 종결지었다.

오늘에 우리에게 주어진 역사적 과제는 북의 도발과 위협에서 벗어나는 일, 국제 사회의 치열한 생존경쟁 와중에서도 평화를 도모하는 가운데 떳떳이 살아남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룩한 경제 성장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킬 뿐 아니라, 도덕과 문화생활도 부단히 개선하여 온 국민이 자유와 평등과 인권의 존중을 누리며 이를 자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는 일 등 현실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일에 매진하는 일일 것이다.

개혁신학회에서 주제발표 중인 김영재 박사. ⓒ류재광 기자
▲김영재 박사. ⓒ크투 DB

김영재 박사
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