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하나님은 ‘그가 심판하면 어느 누구도 건질 자 없는’ 절대 심판자요. ‘그가 구원하면 어느 누구도 심판할 자 없는’ 절대 심판자이시다(사 43:11-13). 한자의 ‘모순(矛盾, 창과 방패)’ 같은 ‘절대 구원’과 ‘절대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구원자가 되시려고 피(被)심판자가 되신 하나님

제사법에서 ‘짐승 대속물’은 성자 그리스도가 ‘실체 대속물(히 10:5-10)’이 될 때까지 한시적인 그림자(히 10:1) 역할 외에, 처음부터 피심판자(The Judged, 被審判者)는 인간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시사한다.

그리스도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계 13:8, the Lamb slain from the foundation of the world.)”이셨음은 그가 ‘피심판자’이 될 것으로 미리 작정됐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죄의 대속물이 됐다’는 말은 에두른 표현이지, 사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피심판자가 됐다’는 말이다. 그가 십자가 ‘형벌을 받은 것’은 택자를 대신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죄로 전적 무능해진 인간은 ‘피심판자’의 자격이 없으므로, 그가 아무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도(심지어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그것으로 그의 진노를 풀어드릴 수 없다.

그에게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하려면 ‘합법적인 피심판자’의 자격을 가진 의인(義人)이 그를 위해 대신 심판을 받아주는 길뿐이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2위(二位) 성자이시다. 그가 성육신(成肉身)하여 택자들 대신 심판을 받으심으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지셨다. 그가 십자가에 달려 심판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만족하여 택자에 대한 그의 진노를 푸셨다.

소위 안셀무스(1033-1109)의 ‘만족설(滿足說, satisfaction theory)’로 통칭되는 ‘보속(補贖) 교리’이다.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사실 스스로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것을 통해 택자에 대한 그의 진노가 풀어짐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구원자가 되셨다(‘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했다’의 정확한 의미는 ‘그가 누구에게서 진노를 푸셨다’이다).

“하나님이 죄인의 ‘심판자’와 ‘구원자’가 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스스로에게 심판을 가하므로 곧, ‘심판자(The Judge)’가 ‘피심판자(The Judged)’가 되심으로 죄인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뜻이다.

겉으론 악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들의 손을 빌어 자신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내어 준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진노 해소’는 시쳇말로 ‘셀프 해소(self-solution)’이다.

유대인들이 ‘합법적인 피심판자’인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가 아닌, ‘짐승 제사’와 ‘인간 의행(義行)’으로 그의 진노를 풀어 드리려 했던 것은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지옥의 의미

이미 언급했듯 ‘합법적인 피심판자(lawful ‘The Judged’)’가 못 되는 죄인이 받는 형벌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릴 수 없기에, 하나님은 처음부터 ‘죄인의 죄값’을 그들에게서 찾지 않고 하나님 당신에게서 찾으려고 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전적무능한 ‘죄인과 그의 공로’가 아닌 ‘합법적인 피심판자 그리스도와 그의 대속’에 주목했다.

비록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에서 성립됐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발생했지만, ‘그에 대한 진노가 그쳐질지 말지 여부’는 그가 ‘합법적인 피심판자’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여부에 의존시켰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심판을 말할 때 ‘율법 순종의 여부’가 아닌, ‘나를 믿느냐 안 믿느냐’를 앞세운 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느냐 마느냐’가 ‘합법적인 피심판자’인 그리스도를 믿느냐 마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요 3:17-18).

죄인들에게 진노를 쏟아 붓는다고 당신의 진노가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은, 처음부터 ‘합법적인 피심판자(lawful‘The Judged’)’인 자신에게 진노를 쏟아 부으려고 작정하셨다. 2위 성자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요 3:16) 곧 자신에게 심판을 행한 것이다(행 20:28).

여기서 영벌의 장소인 지옥(막 9:47-49, 살후 1:8-9)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합법적인 피심판자의 대속’을 전가받지 못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지 않을 한 곳, 곧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의 벌’을 하나도 상쇄시키지 못할 곳이 필요해진다.

그곳이 지옥이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8)”고 말씀하신 바로 그곳이다. 영원히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꺼지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노로 고통당하면서도 죽을 수도 없는, 그리고 그가 받아온 수많은 고통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조금도 상쇄할 수 없는, 영원한 딜레마(Dilemma)에 처해지는 곳이다.

이는 ‘희랍 신화(Greece myth)’에 나오는 다나오스(Danaos)의 50명의 딸들 중 49명이 그들의 남편을 살해한(그들 아버지의 명령을 쫓아) 죄과로 영원토록 ‘밑없는 물통에 물을 길어 붓는’형벌을 받았던 것과 유사하다.

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진다. 이는 ‘합법적인 피심판자’ 그리스도가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낸 결과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풀고 못 풀고의 관건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혹독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냈느냐’, 혹은 ‘얼마나 공로를 세웠느냐’보다는 진노를 받는 자가 ‘합법적인 피심판자’인가에 달려있다. 핵심은 ‘진노를 받는 자의 자격’이다.

‘합법적인 피심판자(lawful ‘The Judged’)’의 자격을 갖지 못한 죄인이 자신이 받는 ‘형벌’이나 ‘보속’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상쇄하려는 것은 분수를 망각한 교만이다. 그가 아무리 혹독하고 오랜 형벌을 받고 대단한 공로를 세웠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죄지은 자가 죄값을 지불해야 한다’는 ‘죄형법정주의(the principle of legality, 罪刑法定主義)’는 세상 법정에선 유효하지만 ‘합법적인 피심판자’의 자격을 요구하는 ‘하나님 법정’에선 먹히지 않는다.

이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예견하시고 죄값을 치룰 수 있는 유일한 자격자인 ‘하나님의 어린양’을 창세 전에 준비하셨다(계 13:8). 오직 그만이 택자를 대신해 심판받도록 예정된 ‘합법적인 피심판자’이다.

오직 그에게 진노를 쏟아놓을 때만 죄인에 대한 진노가 그쳐진다. 은혜롭게도 하나님은 그 ‘합법적인 피심판자’의 대속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전가(轉嫁)시켜 주므로 그에게서 하나님의 진노가 그치게 하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편의주의나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그만이 하나님이 세운 유일한 ‘합법적 피심판자’임을 알며, 믿음으로만 그의 대속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 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