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민족 지도자들 대부분 기독교인
한미관계, 기독교의 위치와 의미 중요해
기독교 지도자들 해방 후 지역별 활동도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6-8권.
대학중점 연구소로 선정돼 ‘해방 후 한국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주제로 연구활동 중인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박사)에서 결과물로 ‘현대 한국사회와 기독교 연구총서’ 3권을 최근 발간했다.

연구총서 6-8권인 이들 도서는 <해방 후 한국정치와 기독교인>, <한미관계와 기독교>, <한국 지역사회와 기독교> 등이다.

6권 <해방 후 한국정치와 기독교인>은 최매지·김병연·이윤영 등 해방 후 정치 분야에서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기독교 세력의 정치단체 참여와 활동, 해방 후 북한의 기독교, 사회 자본으로서의 종교 등의 문제를 망라하고 있다.

‘기독교의 대한민국 건국 기여’에 대해 소장 박명수 박사는 “이승만과 김구, 김규식과 조만식 등 한반도의 중요한 민족 지도자들이 대부분 기독교인들이었고, 북한에서 월남한 기독교인들도 대한민국 건설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며 “남한 기독교는 좌익의 활동에 맞서 민주 세력의 보루로서 역할을 담당했고, 특정 정당을 형성하기보다 일반 정당이나 단체를 만들어 활동함으로써 기독교의 영향력이 특정 정당을 넘어 더 넓게 확산됐다”고 평가했다.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박 박사는 “한국 기독교는 서구 근대 문명을 한국 사회에 소개하고, 일제 강점기에 민족의 독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점”이라며 “근대화와 독립운동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만들지 못했다면, 오늘의 한국 사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오늘의 대한민국은 서구문명의 도입과 함께 군주정치를 버리고 공화정치를 갈망하는 새로운 시민계급의 등장으로 이뤄졌다. 이런 정신은 1919년 3.1운동을 일으키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만드는 데 기초가 됐다”며 “해방 후 어떤 나라를 세울 것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됐을 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한반도에 자신들이 오래 꿈꿨던 서구 민주주의 국가가 건설돼야 한다고 믿었다”고 전했다.

7권 <한미관계와 기독교>는 대한민국의 독립과 생존, 발전과 현재의 위상을 고려할 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단 하나의 국가, 미국(美國)과 대한민국 간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연구자들은 1883년 주 조선공사관을 개설하면서 시작된 양국간 관계의 가장 중심적 매개를 ‘기독교’로 보고 있다.

집필진 중 1인인 양준석 교수는 “미국은 1948년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승인을 견인했고, 6.25 전쟁 후 세계 최극빈국이 된 한국의 재건을 지원했으며, 한국 경제를 세계 경제 구조와 연결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며 “다른 한편 미국은 일제 강점기 한국인들의 핍박과 고난을 외면했고, 미국의 국익과 부합하지 않는 한국인들의 강력한 독립 의지를 주저앉히기도 했다. 냉전기 북한에 대한 안보 정책에서 한국과 갈등했고, 한국 군사정권을 지원해 민주화를 지연시켰다”고 설명했다.

김명구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2018년 ‘한미관계와 기독교’ 관련 발제 모습. 발제 김명구 교수, 논찬 최재건 박사(오른쪽부터). ⓒ연구소 제공
양 교수는 “미국 정부의 한국 지원은 미국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아 부침이 있었지만, 미국 기독교인들의 한국 지원은 일제 탄압과 공산화, 가난과 독재의 위협에 빠진 한국인들을 절망적 상황에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돋록 지속적으로 지원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며 “한미관계는 외교·경제·안보 요인으로만 설명하기 쉽지 않다. 오히려 기독교를 양국 관계의 축으로 설정할 때, 지난 세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조화로운 설명이 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명수 박사도 “비록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중 하나였지만,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가장 크게 성장했고, 평양 지역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와 천주교의 선교부가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이들의 선교보고를 통해 한국을 알게 됐고, 한국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을 보면서 미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했다”며 “해방 후 미군이 한국에 왔을 때 따뜻한 영접을 받은 것은 바로 그들 이전에 수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을 위해 눈물과 땀을 흘렸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한미관계에 있어 기독교가 갖는 위치와 의미가 중요했지만,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던 점에 착안해, 연구소는 2018년 ‘한미관계와 기독교’라는 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이 총서의 초석을 닦았다.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2018년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22회 영익기념강좌 기념사진.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공
가장 최근에 나온 8권 <한국 지역사회와 기독교>는 해방 직후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의주, 서울, 인천, 안동, 광주, 전주, 대전, 임실 등 전국 각 지역에서 무슨 활동을 어떻게 했는지를 탐사했다. 여기에는 영락교회를 비롯해 인천 내리교회 등 각 지역 거점 교회들이 역할을 담당했다.

한국 사학계가 최근 중앙집중적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지역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많은 연구성과들이 나오고 있는 것과 관련, 기독교 역사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겠다는 것이다.

그 동안에는 기독교의 수용과 선교사 및 한국인들의 관계, 일제시기 민족운동과 기독교의 역할 등 굵직한 기독교 역사의 흐름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서울과 평양 위주의 기독교사 연구를 넘어 각 지역에서 기독교의 수용과 성장, 역할 및 영향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진행 중이다.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국제학술심포지엄
▲2019년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와 기독교 주제로 개최된 서울신학대학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의 국제학술심포지엄. ⓒ크투 DB
한 예로 소장 박명수 박사는 ‘해방 직후 신의주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국가 건설운동’을 살폈다. 연구 결과 신의주는 일제 시기 새롭게 성장한 도시로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근대적 시민사회가 형성됐다.

이에 기독교인들은 해방 후 임시정부를 봉대하여 민주국가 건설을 염원했으나 소련의 압박으로 그 뜻을 펼칠 수 없어, 결국 월남해야 했다. 월남한 이들은 북한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갖고 미국 등에 지속적인 청원을 넣게 된다. 그 대표적 인물이 한경직 목사로, 그는 서울 영락교회에서 남한을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기에 이른다.

연구소는 지난 2018년까지 1단계 연구를 통해 <해방공간과 기독교 Ⅰ>, <해방공간과 기독교 Ⅱ> 2권과 <해방 후 한국 기독교인의 정치활동>, <해방과 대한민국 독립>, <해방 후 월남 기독교인의 활동과 통일> 등을 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