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사 54:1-3)”.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 제목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노래는 언제 하는 것입니까. 너무 기쁘고 신이 나면 합니다. 누가 노래하게 된다는 것입니까. 잉태하지 못하고 출산하지 못한 자가 노래합니다. 이 말은 이제는 잉태하고 이제는 출산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그런데 노래할 정도니 많이 낳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에 대한 예언일까요.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제국에 포로로 끌려가 많이 죽고 비참해지고, 그 백성들이 고난 속에서 멸절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주는 희망의 예언입니다. ‘이제 너희 백성들이 이제 많아진다’, ‘ 이제 고난의 때가 끝나고 포로생활도 끝나고 이제 해방되어서 크게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들려집니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어떤 이는 교회의 부흥에 대한 예언이라 했습니다.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이 새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척교회여 노래하라. 텅빈 교회여 노래하라”. 이제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멘.

자, 그런데 이 예언의 근거는 뭘까요? 무슨 근거로 그런 부흥이 오는 것일까요? 어떻게 이 놀라운 예언이 이뤄진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이기 때문에? 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꼭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더 분명한 확신을 갖고 싶습니다. 어떻게 이 예언이 우리 교회 가운데 또 나에게 이뤄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 예언의 체계성, 예언의 정확성이 있습니다. 본문 예언 앞에는 이사야 53장이 있습니다. ‘고난의 종에 관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먼저 있기 때문에 오늘 이사야 54장의 예언이 이뤄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여기서 ‘그가 누구인가’ 이것이 참 궁금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주전 600-700년 전 사람입니다. 그때 한 예언임을 생각해 볼 때, 너무 놀라운 예언입니다.

‘그가 누구인가’ 이것이 너무 궁금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입니다.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에티오피아 내시도 너무 궁금해 했습니다. “그가 누구냐? 이사야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냐?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냐?” 왜 이것이 궁금했을까요?

나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대신 고난을 받은 분이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명을 쓰고 오해를 받으면서 우리 죄악을 담당하신 분이 있다니까, 너무 궁금했습니다.

에티오피아 내시 자신이 가진 저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으로부터 해방시켜줄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냐?” 라고 물었을 때, 빌립 집사가 입을 열어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에티오피아 내시가 그날 그시에 성령의 감동을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중생한 것입니다. 그의 삶을 짓누르던 모든 저주를 벗고 새로운 생명을 얻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한 장의 예언, 이사야 53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변화된 장입니다. 그 한 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중요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월이 있습니다. 내가 잘 살았다 싶은 때도 있겠지만,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다가오는 때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 삶을 무겁게 하는, 어둡게 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전 세월이 죄악으로 얼룩져 있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일들로 상처받은 기억들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충격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습니다. ‘저주’ 입니다. 자극적인 단어입니다. ‘너 저주받았다’ 라고 할 때, ‘너는 뭘 해도 안 되고 뭘 해도 망하고’, 더 직설적 표현은 ‘너는 뭘 해도 재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이라는, 비관론.

신명기 28장을 보면 복과 저주가 극명하게 나눠져 있습니다. 어떤 인생은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이거 해도 잘 되고 저거 해도 잘 되고. 그런 인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인생은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고, 떡반죽 그릇도 저주받고 네 가축도 저주받고. 뒤로넘어져도 코가 깨지고.

그게 무엇으로 갈라집니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 그 생명의 법을 따라 사느냐, 그 법을 깨고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사느냐? 여기에 복과 저주가 달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성경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생명의 법이니까요. 그 법대로 살면 복을 받는 것이니까요.

왜 유태인들이 그렇게 많은 복을 받았습니까. 수많은 지혜자들, 수많은 부자들, 노벨상 수상자를 200명 넘게 배출하는 넘치는 복을요. 그들은 늘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떻게든 지키며 살고자 힘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알아도 힘든 게 있습니다. 그 법을 지키며 살고자 해도 어려운 게 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바울이 갈라디아 교우들에게 이야기한 ‘율법의 저주’가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 살고자 하면 할수록, 우리 안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양심의 가책을 더 느끼게 되는, 더 내가 죄인이 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 죄로 우리가 더 무거워지고 어두워지게 됩니다. 옛말에 ‘혹 떼려다 혹을 하나 더 붙이게 되는 격’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모든 인생이 새로워지려면 이사야 53장을 읽어야 합니다. 불신자뿐 아니라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인생은 리셋(reset)이 됩니다. 언제든지 새로운 출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주님께서 우리 죄악을 대신해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해서 받아야 할 벌을, 우리가 나쁜 짓을 해서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다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가 뭔가요? 십자가입니다. ‘보혈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그 대속(redemption)의 은혜를 믿어야 합니다. 이걸 믿는 순간, 이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전의 삶이 어떠했어도, 후회되고 고통스럽고 안타까운 삶을 살았더라도, 완벽한 청산이 이뤄집니다. 우리 인생이 괴로운 것은 대부분 그런 과거의 청산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발목이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문 속에도 뭐가 있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해 기도하고, 그리고 일용할 양식, 물질, 돈입니다. 그것을 구합니다.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우리 삶이 먹을 것이 부족함 없게 해 달라고 구하고 나면 남는 게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도 믿고 경제적으로도 괜찮아지면 무슨 문제가 남습니까. 용서의 문제입니다. 과거에 나에게 잘못했던 사람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용서는 과거로부터 내가 자유해지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합니까? 내 삶에 저주가 있는 것 같다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해서입니다. 과거에 매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의 아들들 중에 함이 저주를 받아요.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가족들입니다. 구원받은 자들 안에 둘째아들 하나가 저주를 받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과거의 것으로 자꾸 돌아가는 것입니다. 과거의 것으로 자꾸 오늘을 생각하고 그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 삶에 저주가 있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이걸 어떻게든 풀어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응어리진 것들,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 것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습니까. 또 그래서 우리 인생이 자유해지고 전혀 새로워질 수 있습니까. 대속(代贖, redemption) 입니다. 이사야 53장입니다. 이래서 그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이는 “목사님, 제가 새로워지기엔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습니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것같고요, 잘못 살아온 세월이 너무 깁니다”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내가 살아온 세월이 아무리 많아도 과거는 정말 짧은 것입니다. 영원한 미래에 비하면. 직선으로 생각해 봅시다.

시작점을 태어난 날로 생각해 봅시다. 나중에 죽는 날이 있다 해도, 이 땅에서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그로부터 우리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대속을 믿는 순간부터, 그날 그시로부터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원까지 말입니다.

여러분, 왜 오늘 이런 말씀을 할까요? 지금 우리는 이사야 54장이 성취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 예언이 우리에게 응하여, 놀라운 부흥을 이뤄가는 때를 살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팬데믹이 있고 홍수가 있고 정치적인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때는 지금 위기 속에 오히려 더 큰 역사를 여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때가 오면 뭐합니까? 내 마음이 어둡고 내 안에 은혜가 없고 기쁨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온 세상에 천국이 와도 내 마음은 천국이 아니라면, 조금도 나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새안교회 어느 형제와 대화하는데, 이런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화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내 안에 주님 사랑이 안 느껴지는데, 다른 게 뭐가 소용있습니까? 그렇다고 주님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 괴로움을 어떻게 해야할까요?’

우리 교회는 ‘보혈의 십자가’ 라는 강의를 다 울면서 들었습니다. 요한복음 18-19장을 깊이 주석한 강의입니다. 왜 울었을까요? 예수의 그 고난이 정말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그 십자가 고통의 크기만큼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최근 한 가지 위로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전 날 열심히 하시다가 오해도 받고 상처도 받고 그래서 너무 힘들고 괴로운 세월을 많이 보내셨습니다. 죽을 것처럼 힘든 기간을 보내는데, 그러니 교회가 무슨 전도가 되겠습니까? 무슨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죽겠는데, 내 안에 밝음이 없는데….

그러다가 살기 위해서 기도를 하셨답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기도하고 또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이 울고, 울부짖었을까요? 그 고통과 한의 모든 것들을 얼마나 하나님께 토해내셨을까요?

그런데 그 깊은 기도의 과정 가운데 하나 하나 상처의 깊은 것들을 주님이 치유해 주셨다고 합니다. 세상이 치유해줄 수 없는 것들을, 주님께서 다 치유해주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고 나니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영적인 동물입니까. 그것을 다 압니다. 알고 찾아옵니다. 그때부터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저 자신과 목회 사역에도 깊은 교훈을 주는 간증이었습니다.

여러분, 과거의 아픔이 있습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내가 잘못 살았다는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무거운 마음이 있습니까? 혹은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미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모든 허물과 죄를 다 지고 대신 고난 당하시고,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희생이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나를 자유케 하고 나를 살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며, 그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오늘도 새롭게 받아들입시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우리가 가지면 지금 이 순간 즉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사야 54장을 읽을 수 있습니다. 노래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찬양할 수 있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산고를 겪지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사 54:1)”.

이제 세상 사람들보다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크게 부흥한다는 것입니다. 대속의 은혜가 우리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죄를 다 청산한 기쁨이 우리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입니다. 사람도 돈도 그냥 붙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뭘 해야 할까요. 준비를 해야 합니다. 큰 부흥의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사 54:2)”.

‘장막터를 넓히며’ 라고 했습니다. 제주도에 8제곱미터 크기의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3평도 안됩니다. 입구는 ‘좁은 문’ 글귀가 있습니다. 그 교회도 세워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영혼을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많이 보내주신다는데, 그들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구원받은 자들, 저주의 사슬로부터 자유케 된 자들안에 이제 큰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큰 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 이뤄지리니.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사 54:3)”.

아멘. 좌우로 퍼집니다. 나를 통해 전도되는 사람이 많아지고, 또 그들이 세계를 누비게 될 것입니다. 황폐한 성읍들, 예수 믿지 않는 곳들과 지역들, 나라들을 다 변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 소중한 예언의 말씀이 우리를 통해 성취될 것을 믿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힘입고 또 대부흥의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가는 새안교회 및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바랍니다.

장시환 목사(서울 길음동 새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