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출애굽기 32장 30-35절

사랑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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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모욕감도 이겨낸다

지금은 죽고 없지만, 서울 통의동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송이 살고 있었습니다. 높이 16미터에 수령이 약 600년쯤 되는 백송은 어느 날 강풍을 동반한 폭우로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죽은 백송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부터 1945년까지의 나이테 간격이 거의 변동이 없을 만큼 좁고 짙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나무도 일제 강점기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나무는 성장하는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를 마치 자서전처럼 나이테에 고스란히 남긴다고 합니다.

나무뿐 아니라 사람도 인생을 살아 가다 보면 좁아진 나이테처럼 어렵고 견디기 힘든 순간이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 중 하나가 모욕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부하 직원 앞에서 상사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입니다.

세상에서 나보다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모욕을 당함에도, 그것을 거뜬히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부모들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려고 합니다.

어떤 모욕을 당하더라도 자식에게만큼은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하는 부모의 모습을 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바로 자식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모욕감을 이겨냅니다. 부모님의 자존심마저도 다 내려놓게 합니다.

수치심도 이겨낸 수로보니게 여인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갔을 때,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로 나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자신의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다면서, 불쌍히 여겨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여인이 너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니까, 그녀를 좀 어떻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반응을 보이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 절하며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개 취급하셨습니다.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당황스러운 말씀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이 여인을 개 취급해도, 예수님은 그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수치심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긍정하고 있습니다.

“예, 예수님 말씀 잘 하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개입니다. 하지만 개도 제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고 수치감을 주는 예수님께 어떻게 이렇게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까? 딸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딸을 살리고자 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그 수치심마저도 이겨내게 합니다.

사랑=친숙하면서 가장 위대한 단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고 친숙한 단어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단어도 역시 사랑일 것입니다. 가장 친숙하면서 위대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가슴으로 하는 사랑은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슴으로 사랑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가서 8장 6절에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서 40일 동안을 머물게 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그 앞에서 춤추고 뛰놀고 있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멸해 버리겠다고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내세우시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지켜야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겨우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급히 모세가 산을 내려와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습이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화가 난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써주신 십계명을 두돌판을 던져 깨뜨려 버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녹여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마시도록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편에 서겠다고 나온 레위 자손들을 통해 여전히 돌이키지 않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 가운데 3,000명이나 살육을 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왜 올라갑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해 올라갑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 32:31-32)”.

사랑하기에 가능하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데, 모세가 지금 이 기도를 하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모세는 지금 3,000명이나 되는 자신의 동족을 죽이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던 죄악이 용서받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진멸해 버리신다고 하셨을 때 모세는 직접 현장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을 말씀 드리면서 겨우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혔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모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셔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으면 차라리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 내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록하신 책은 생명책을 의미합니다.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곧 모세는 자신은 지옥 불에 떨어져도 좋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달라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자기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잘 하지 않습니다. 특히 내 생명이 달린 문제라면 그것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야 이 세상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사람도 필요한 것이지, 내가 죽고 나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하면 달라집니다. 진짜 사랑하면 모세처럼 됩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지옥 불에 떨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다고 한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면 달라집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모세와 똑같이 기도했던 사람이 성경에 한 사람 더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바울 역시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져도 나의 동족을 구원받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역시 자신의 동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사랑의 사람이다

백부장은 예수님께 이방인이면서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받은 인물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믿음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나와서 간구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중풍병에 걸려 드러누워 있는 하인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황제 외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다고 하는 로마의 장군이, 식민지 청년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자신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종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지배 계급에 있어서 하인은 사람의 가치로 취급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동물과 같이 돈으로 거래 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 하인은 더구나 중풍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를 맞고 있는 종이었습니다. 중풍병이 걸렸다면 나이가 벌써 어느 정도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이고 노동력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죽을 위기에 처해 있다면, 백부장에게 있어서 이 종은 오히려 짐이 되는 종이었습니다. 차라리 짐이 되는 존재라면,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맞습니다.

이런 종을 살리겠다고 백부장은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7장 2절에 보면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백부장은 비록 그 종이 노동력도 없고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종이었지만, 그를 한 인격체로 여기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비록 로마의 장교이지만, 종을 향한 사랑이 예수님에게 무릎을 꿇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뭐든 다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랑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저를 위해, 자식을 죽일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니 감옥에 갇힌 죄수를 위해 자식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랑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마음에 남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사랑할 적엔 누구나 ‘바보’가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 밖에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엔 누구나 ‘장님’이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엔 누구나 ‘귀머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 목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엔 누구나 ‘벙어리’이가 된다고 합니다. 그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너무 좋아서 말할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적엔 누구나 ‘욕심쟁이’가 된다고 합니다. 단 한 사람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에 한 줄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사랑할 적엔 누구나 ‘상상할 수 없는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 힘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해보신 분들은 아마 다 이 말에 동의를 하실 겁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때로는 바보가 되기도 하고,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기도 합니다. 욕심쟁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먼저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쓸 때가 많습니다. 내가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도도 어느 정도 하고 기도도 어느 정도 하고 신앙생활을 잘해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먼저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사랑하면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기도하지 말라고 해도 기도합니다. 전도하지 말라고 해도 전도합니다. 교회 봉사하지 말라고 해도 봉사합니다. 예배의 자리로 나오지 말라고 해도 나옵니다.

이것이 사랑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지금 이 시대를 향하여 많은 사람들이 삭막하다고 말을 합니다. 삭막하다는 것은 곧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다.

찬송가 503장 1절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어떤 이는 고통과 근심 걱정 많으니 사랑 없는 까닭에 저들 실망하도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세에는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 때 일어날 현상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4)”.

바울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현상 가운데 서로 사랑하지는 않고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들여다보십시오.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 직장에서 일어나는 문제, 교회에서 일어나는 문제, 나라에서 일어나는 문제. 결국 그 속에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하면 용서할 수 있는데, 사랑이 없으니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자신의 유익보다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데 사랑하지 않으니 자신의 유익만을 구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예언의 능력이 있어서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입니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남을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내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 속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고 말씀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을 감동시킨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께 이 백성의 죄를 사하지 아니하시면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달라고 기도했을 때 정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은 감동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을 감동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내 것을 희생하며 사랑하는 그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부 시절 하나님께서 수련회때 은혜를 부어주셔서 많은 아이들을 하나님을 만나고 방언의 은사를 경험했습니다.

그 은혜의 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한 번은 기도회를 마친 후 후배 여자 하나가 저한테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 친구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것이 소멸이 되었는지 방언이 나오지 않아 눈물을 흘리며 안타깝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한테 주신 방언의 은사는 거두어 가시고 그 친구에게 다시 방언의 은사를 내려주세요.” 그 이후에 진짜 그 친구가 다시 방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빠 나 이제 하나님이 거두어 가셔서 방언 못하는 거지?”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후배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친구를 사랑하는 너의 마음을 보시고 오히려 너 축복해 주실 거야.”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희생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해 보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축복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하는 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너희가 사랑할 수 있는 만큼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 기준에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에 대해 이렇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9)”.

주님께서는 이웃에 대해서는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생각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합니다. 우리 몸이 더러우면 씻어줍니다. 배가 고프면 먹습니다. 피곤하면 쉬어줍니다. 아름답고 멋지게 늘 꾸밉니다. 이것이 모두 나를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웃도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주님은 한 가지를 더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데 전체를 붙이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면서 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주님께 받은 사랑만큼 이웃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힘이 셉니다. 사랑하면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모욕감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담대해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목숨도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 ⓒ크투 DB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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