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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그리스도인은 구도자인가

그리스도인은 흔히 일반 종교인들이 생각하듯 ‘신을 찾아 막연히 헤매는’ 구도자(seeker, 求道者)가 아니다. (본래 ‘구도자’란 단어는 기독교에 쓸 수 없다. ‘거듭남의 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찾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찾은 바 된 자(man who was found by God, 롬 10:20)’라고 함이 정확하다. 이는 인간 자력으로는 하나님을 찾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엡 1:4)’에서 그의 택자를 찾으시기로 예정하셨다.

그의 성육신 전에는 ‘제사’와 ‘선지자들’을 통해, 2천 년 전 성탄절에는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으로, 그리스도 승천 후 오순절에는 성령으로 찾아 오셨다(행 2:1-4).

이후 하나님은 복음 전도를 통해 성령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나타내셨다(행 10:44). 그러나 그를 알아 본 자들은 많지 않았다.

여전히 ‘유대인들’은 ‘성전과 회당(요 2:14, 마 9:35)’에서, 이방의 ‘아덴인들’은 ‘알지 못하는 신의 제단(행 17:23)’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오늘 ‘명목상의 기독교인들’ 곧, 자칭 ‘구도자들’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찾아 헤맨다.

엄마 잃은 아이가 엄마를 찾아 헤매다 그에게서 더욱 멀어지듯, 죄인들이 하나님을 찾을수록 하나님과 더 멀어졌다. 유대인들 역시 그랬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에 도취돼, ‘그들에게 종일 손을 벌리고 있는 하나님의 손(롬 10:21)’을 외면하며 더욱 하나님과 멀어졌다.

성경은 이를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2)”는 말로 표현했다. 그들의 ‘지식 없는 열심’이 그들로 하여금 더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죄인과의 화목(불화) 처소’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부르신다. 죄인에게 ‘예수 이름’을 전하는 복음 전도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찾아 부르시는 음성이다. 하나님은 전도자의 입을 통해 그의‘잃은 자녀(the lost sons)’를 부르고 계신다.

‘OO야 어디 있니? 엄마 여기 있다’며 잃은 자녀를 향해 애타게 부르짖는 엄마처럼 하나님도 잃어버린 그의 택자들을 애타게 부르신다. ‘미아(迷兒)’인 택자는 그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돌이킨다.

‘잃은 죄인(the lost sinner)’은 자력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 죄인은 오직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끌림으로 그에게 발견된다. 성경은 이를 “하나님께 찾은바 됨(being found by God, 롬 10:20)”이라고 표현했다.

성경이 ‘구원’을 ‘부르심을 받음(being called, 사 62:12, 롬 8:28)’으로 표현한 것도 택자 구원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존됐음을 말한 것이다.

죄인은 생득적인 종교성의 발분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 ‘구도자(seeker, 求道者)’가 아니고,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청종자(listener, 聽從者, 삿 6:10, 딤전 4:16)’이다.

◈하나님 사랑은 구매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사랑을 받으라’고 요구하신다. 이는 그의 사랑을 받기 전엔 아무도 그를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10)”는 말씀 그대로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에서, 그 시원(始元)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는 이방인 유대인을 불문한다.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롬 10:20-21).”

이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막무가내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덤비는 이들이 있다. 이스라엘이 그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는 거부하면서 ‘마음, 뜻, 목숨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덤볐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이 ‘하나님 사랑’을 받았다고 자부했고, 그들의 ‘종교적(율법적) 열심’도 그것에 고무된 결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껏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랑’ 곧, ‘단일신론적 사랑(Monarchianistic love)’이지, 우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내포된 ‘삼위일체적인 사랑(Trinity love)’은 아니었다.

이 ‘단일신론적인 사랑’엔 당연히 ‘성령의 증거’가 따르지 않아,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로 인한 ‘영적 공허함’이 그들에게 더욱 온전한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갈망을 일으키고, 그것의 구현을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려는 태도를 갖게 한다.

이런 ‘사랑의 조건화’는 필시 ‘내가 하나님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 그가 나를 거부하면 어떡하지?’ 혹은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을 수반하게 되고, 나아가 바리새인, 서기관들 같은 율법주의 신앙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성령으로 말미암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무조건(초월)성과 절대성’을 경험한 자는 그것이 갖다 주는 ‘영적 포만감’으로 인해 어떤 불안이나 두려움에 연루되지 않는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라는 말씀 그대로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무조건(초월)성과 절대성’의 경험은 ‘사랑의 조건화’를 용납하지 않게 하며, 나아가 자신이 ‘하나님 사랑을 구걸하는 자’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the beLoved of God)’라는 확신을 갖는다.

실제로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함’이 ‘하나님 사랑을 받는 조건’으로 말한 곳이 없다. ‘하나님 사랑’을 요구하는 ‘율법의 대강령’도 ‘사랑(거듭남)의 결과’로 말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신 30:6).”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5:15-17)’라고 물으신 것은, ‘너가 그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나도 너를 저 사람들보다 너를 더 사랑해 줄 것이다’는 반대급부의 조건 제시가 아니었다.

자신의 양떼를 그에게 맡기려는 사명을 위한 질문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지 않으면 ‘그의 양을 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겠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뒷발치에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눅 7:37-38)” 죄인인 한 여자를 향해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고 한 말은 ‘죄 사함의 사랑을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었다.

사도 바울이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는 충성 서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 때문이었다(고후 5:15).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하나님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혹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그가 받은 하나님 사랑에 비례한다’는 뜻이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받는가? 지금까지의 결론이다. 한 마디로, 대가를 지불하려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오지 않는다. 설사 누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을 돈으로 사는 ‘매음(賣淫)꾼의 사랑’같은 ‘짝퉁 사랑’이지 진짜는 아니다.

성령으로 말미암는 완전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받는 자에게만 주어지고, 대가를 지불하려는 자에게는 거부된다.

이 쉬운 은혜의 진리가 많은 사람들의 눈에 감춰졌으니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인 비밀(골 1:26)’이 틀림없도다. 복되도다,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의 비밀이여.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