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김일성
▲1948년 4월 22일, 남북 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김구(오른쪽). 왼편에 김일성이 보인다. 회의를 통해 ‘미군 철수’를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서가 발표됐다.
“아버지, 도대체 왜 당신이 나의 아버지입니까? 내 아버지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친구여야 했습니다.”

부모를 부정하는 불효(不孝)만큼 불행한 게 있을까? 자신을 심신(心身)으로 낳아주신 부모의 은혜를 무시하는 패륜(悖倫)이요, 동시에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부정하는 스스로에 대한 패륜이다. 그러나 천륜(天倫)을 저버리는 짐승 짓이, 이인영 통일부장관의 인사청문회에서 자행됐다.

“우리의 국부(國父)는 김구 주석이 되는 것이 더 마땅했다.” 흐리멍덩하기만 했던 이인영 통일부 장관의 답변 중 가장 명확한 발언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소신과 신념이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國父)로 인정하는 자들을 질타하는 듯한 어투(語套)였다.

이인영 장관의 소신대로 김구는 과연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일까? 사실은 국부로 인정받고도 남을 만 했지만, 대한민국 국민들이 선동당하는 바람에 독립운동의 상징적 존재에 그치고 만 것일까? 그렇다면 김구를 재평가한다면 과연 국부로 모실 수 있을까?

해방 공간을 되돌아보자. 1946년, 38선 이북에서 김일성을 필두로 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결성된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결성된 지 한 달 만에 지주의 땅을 강제로 빼앗으며 실질적인 정부의 기능을 수행한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기도 전에 이북에서는 이미 공산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이남으로도 공산주의의 붉은 물결이 밀려올 수 있음을 간파한다. 국부(國父)는 남은 땅이라도 지키고자,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추진한다.

유엔의 지도를 따라 적법한 절차를 통해 5·10 총선을 치렀고, 건국의 초석인 제헌국회가 구성된다. 2개월 뒤인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됐고, 한 달 후인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무사히 건국됐다.

대한민국은 공산화의 위험 속에서 건국됐다. 그리고 건국의 과정 중에 김구는 크게 2가지 업적을 남겼다. 첫째 5·10 총선거 반대. 둘째 1948년 4월 19일 평양 방문.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란 이유로 투표를 방해했다. 사실 유엔은 북한에서도 선거를 치르려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의 거부로 북한에 출입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선거 감시가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만 투표하기로 합의한다.

김구는 왜 이북 지역의 선거를 막은 소련에 대해선 함구했을까. 그리고 왜 평양에 방문해 남한의 선거를 반대하는 4·30 성명문에 서명까지 했을까.

이인영 통일부 장관도 김구의 행적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국부(國父)는 김구 주석이 되는 것이 더 마땅했다”고 소신껏 답했다.

장관에게 묻겠다. 건국을 방해한 김구를 국부로 모셔야 마땅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은 김구의 오판(誤判)을 존경하는가? 통일부 장관의 직무를 김구의 노선을 따라 수행할 것인가?

국정을 운영하는 국무위원으로서, 국부를 부정하는 패륜은 지양하시길 바란다.

서울신학대학교 김창대 간사
▲김창대 부총무. ⓒ크투 DB
김창대 (1995년생)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거룩한대한민국네트워크 부총무
(사) 대한민국 통일 건국회 청년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