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성경 주해
더글라스 스위니 | 한동수 역 | CLC | 487쪽 | 23,000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경 주해

그리스도인은 한 위인을 우상처럼 여기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의 삶을 따라가는 제자이다. 성도에게 예수님보다 사람이 더 크게 보이고 그의 말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표준과 기준이 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물론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교회와 믿음과 신앙을 배울 수 있다. 그들이 남겨 놓은 믿음의 유산을 통해 우리는 교회를 더욱 잘 섬기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도 성경을 직접 연구하고 성령님이 주신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통과한 결과를 만든 것이다. 즉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를 통해 신앙의 유익을 얻을 수는 있지만, 분별없는 추종자가 되면 안 된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신뢰하거나 사람을 더 높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직접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성도는 직접 말씀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교회사에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신앙의 유익을 얻고 교회를 섬기는 지혜를 발견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필자의 다짐은 늘 점검하고 지키려고 한다. 죄인된 인간의 마음은 늘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을 높이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교회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은 지금도 누구의 추종자라는 별명이 성도에게 붙어다닌다.

이런 호칭이 성도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한다. 위대한 신학자와 목회자를 존경하고 그를 통해 유익을 얻는 정도면 충분하지, 누구의 후예라는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적합하지 않다.

어떤 한 신학자를 연구하고 그의 유산을 정리하는 작업도 유익하고 유의미하다. 그러나 그것도 도를 넘어서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게 느껴지고 성경의 말씀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한 공부인지 뒤돌아봐야 한다.

필자는 교회사 속 여러 인물의 전기와 신학서적을 보면서 유익을 얻지만, 누구의 추종자는 아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제일 배우고 싶고 더 연구하고 싶은 인물을 말하라면 조나단 에드워즈이다.

이미 그에 대한 연구와 서적은 많이 나와 있다. 부흥사, 목회자, 설교자, 철학자, 심리학자, 자연과학자 등 그에게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천재 수준이다. 그러나 그를 더 알기 원하는 것은 그가 천재라서가 아니라, 교회사에 남긴 그의 은혜로운 업적 때문이다.

그는 직접 부흥을 경험하고 그 부흥을 정리하여 책으로 남기고,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말씀과 목회를 통해 정리한다. 당시 이성주의와 경험론에 근거한 과학의 물결이 밀려올 때, 그것을 뛰어넘어 기독교 신앙을 학문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경건하고 균형 있게 체계화시킨다.

물론 그의 신학이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알듯 종말론과 천년왕국에 있어 그는 비성경적 주장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비밀에 대한 풍성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를 통해 얻는 유익은 참된 성도가 되기 위한 도전이다. 과거 한 번의 경험만을 가지고 ‘주여 주여’ 하면서 살아가는 안일한 성도가 많은 시절, 거룩한 감정을 가지고 늘 깨어있는 성도로 살아가게 도와준다.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성도는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데, 부름을 따라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에 강력한 자극제가 된다.

또한 그를 통해 부흥에 대한 사모함과 열망을 유지할 수 있다. 교회를 심심해서 다니고 마지못해 출석하고 무의미하게 다니는 성도들이 있다. 더구나 이 시대에 교회는 무기력하다. 귀신 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해도 조금도 고쳐주지 못하는 상태다.

구원과 회심의 역사는 줄어들고 복음의 능력은 약해져간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그를 통해 교회의 돌파구를 발견할 수 있다. 공공성과 공적 사역을 해야 교회가 회복되는 게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부흥이 교회를 온전케 한다는 고백을 하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사역과 생애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전공자인 스위니 교수가 에드워즈의 성경 주해를 연구하고 쓴 논문이다. 12년간 연구하여 만들어낸 인고의 결과물이다.

에드워즈의 묵상과 노트 성경과 여러 설교집을 분석하여 그가 가진 성경연구와 주해를 추적하여 집대성한 것이다. 사도들과 교부들의 해석을 넘어, 성경을 입체적으로 보고 청교도의 본문-교리-적용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에드워즈의 글을 통해 볼 수 있듯, 이 논문에서도 에드워즈의 주옥같은 표현들을 볼 수 있는데, 독자에게 은혜와 감동이 된다.

학문적인 논문을 통해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에드워즈는 성경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신학자, 부흥가로 인식하기 쉬운데, 그는 철저히 성경을 사랑하는 말씀의 종이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성경을 연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헌신자였다.

그는 말하길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는데, 금으로 주신 게 아니라 금맥을 주셨다고 한다. 즉 금은보화가 담긴 성경을 캐낼 때만 금을 발견할 수 있고 금은보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문을 두드리듯이 성경을 두드리고, 샘을 파듯이 말씀을 파야 하고, 음식을 발효하듯이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로고스로서의 금을 발견하여 에토스의 감동을 가지고 파토스의 감격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이 세계를 섭리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성경이 태양보다 백만 배나 빛이 난다고 한다. 일반 섭리도 위대하지만 특별 섭리에 종속된다고 한다.

위대한 구속사가 성경을 통해 펼쳐지니, 말씀 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열심과 열정을 드러낸다. 모든 성경은 이 땅의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으니, 교회는 진리의 보존과 유지에 힘쓰고 강력한 선포를 하는 곳이어야 한다.

에드워즈의 말씀 사랑과 연구 노력은 오늘날 교회를 섬기는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그는 신실하게 말씀 앞에 머무는 사람이었고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고 마음에 담겨지고 적셔진 언어로 설교하였다.

그는 특별하고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성경 사랑과 말씀연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벌이 꿀을 찾아다니듯이, 그는 말씀을 찾는 종이었다. 그의 주해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씀 연구에 온 힘을 다해도 하나님의 부흥이 올까말까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위해 힘을 쓰고 있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의 몸집을 키우고 환경을 개선하고 현대의 트렌드를 따라가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는 것이 아닌가? 그보다 더욱 시급하고 긴급한 일이 있는데 무엇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인가?

교회를 섬길수록 성경을 아는 지식이 쌓이고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하는 깊이가 더해가야 하는데, 더 약해져 가는 것 같다. 성경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내 마음을 두드려야 하는데, 아무 감동이 없는 것 같다.

에드워즈는 말씀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것이 사역의 성취도를 가늠하는 기준이라고 하는데, 그런 기준으로 보면 나는 본질적인 사역에서 멀어져가는 것 같고, 현대교회는 정도에서 너무 벗어난 것 같다.

바쁘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다. 꿀벌도 바쁘지만, 모기도 바쁘다. 성경을 대하는 목회자의 자세와 태도와 시간이 그의 사역의 품격과 권위와 설교의 권위를 결정한다. 설교 때마다 생수가 길러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이 책을 통해 그의 성경주해의 방법을 엿볼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의 조화, 문자적 해석, 알레고리, 교훈적 의미, 신비적 의미, 구속사, 모형론, 그리스도 중심론, 종말론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그것보다 이런 주해를 하게 하는 성경을 향하는 그의 사랑이 돋보인다. 에드워즈는 말씀 사역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성경을 사랑하는 성도이다.

방영민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서현교회 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