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술람미 여자(Shulamite)에 대한 솔로몬(Solomon)의 사랑’은 흔히 ‘콩깍지 사랑(Lovers are fools)’이라는 이름으로 회자된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후궁들이 득실거리는 궁중에서, 그들 다 제쳐놓고 ‘게달의 장막(the tents of Kedar)’ 같은 거무티티한 ‘촌닭’을 솔로몬이 최애(最愛)했다는 것 때문이다.

‘아가서(song of songs, 雅歌書)’에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 왕의 ‘콩깍지 사랑’이 순애보(殉愛譜) 형식으로 그려져 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1:5, 2:8-10)”.

◈콩깍지 사랑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 221) 사람, ‘등도(登徒)’도 아내에 대한 ‘콩깍지 사랑’으로 유명하다. 박색(薄色) 부인과 그녀에 대한 등도의 사랑이 ‘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에 기록돼 있다. 다음은 그 일부이다.

“그녀의 머리는 쑥대밭처럼 봉두난발(蓬頭亂髮)이고 입은 언청이(口脣裂)요. 치아는 드문드문 빠지고 피부엔 종기까지 난 추색(醜色)이었다. … 그러나 등도는 평생 그 부인을 아끼고 사랑했다.”

솔로몬과 등도의 ‘콩깍지 사랑’은 ‘누구를 사랑함엔 이유가 없다’는 명제를 재삼 확인시켜 준다. 오래 전, 책에서 읽었던 어떤 사람의 경험담도 같은 교훈을 준다.

어느 날 그가 미국행 비행기에 탑승했는데, 옆 좌석에 한 미국인 승객이 탔다. 그는 앉자마자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다는 듯, 다짜고짜로 자신의 지갑 속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보이며 ‘자기 아내인데 너무 이쁘지 않느냐’는 것이다.

잠시 당황스러움을 뒤로 물린 채 사진에 집중해 본다. 한 마디로 ‘미국인과 한국인의 미의 기준이 이렇게 다른가’ 할 정도로 박색(薄色)이다. 그러나 면전박대(面前薄待) 못하는 한국인의 미덕을 살려, 혀에 기름칠을 하고 ‘정말 보기드문 미인이군요’라고 해 주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콩깍지 사랑’은 이에 비할 바 아니다. 그 취향은 ‘유별남’을 넘어, 혹 ‘그의 눈이 색맹(色盲)이나 사시(斜視)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는 다른 누구에게보다 필자인 내게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말이다.

‘눈 먼 사랑(blind love)’, ‘제 눈에 안경(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콩깍지 사랑(Lovers are fools)’ 등 온갖 문구를 다 동원해도 내 자신을 설득시키지 못하며, 나로 언제나 유구무언이게 만든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독특한 취향’을 ‘그의 기쁘신 뜻대로(엡 1:5)’라는 말로 축약했다. 풀이하자면 ‘그냥’, ‘내 맘이야’라는 뜻이다. ‘사랑’이란 본디 ‘그냥’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이유가 있어 사랑한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은 못된 야곱도, 찌질이 나도 ‘그냥’ 사랑하셨다(롬 9:11-16).

◈영원한 부성애(父性愛)

하나님의 택자 사랑은 영원에 뿌리박은 ‘가없는 사랑’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사랑엔 ‘변함’도 ‘마감’도 없다. 택자에게 전가(轉嫁)된 ‘아담의 원죄’까지도 그의 사랑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하나님의 눈에 그것은 그저 중간에 치고 들어온 돌발적인 사건일 뿐, 그것 때문에 그의 택자 사랑이 흔들릴 수 없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갈 3:17)”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하나님이 택자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수 있었던 것도(요 3:16, 요일 4:10), 이 ‘영원한 사랑’ 때문이다.

경제 이론에 ‘등가교환(exchange of equivalents, 等價交換) 법칙’이란 게 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댓가를 지불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이 ‘영원한 사랑’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들은 어찌 하나님이 자기 같은 피조물 죄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할 수 있느냐고 의구심을 드러낸다.) 그 결과 택자에게서 ‘사망’이 거둬지고, ‘영생’이 결실됐다(요 11:15-26, 행 13:48).

믿는 자가 자신의 ‘영생’ 획득을 과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함은, 그것이 ‘하나님의 희생으로 얻은 결실’이기 때문이다. ‘영원(eternity)’을 심었다면, ‘영생(eternal life)’을 거두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택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부성애적(父性愛的)’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기 희생은 단지 ‘피조물 죄인’을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생명과 동일시한 ‘택자 자녀’를 위한 ‘부성애’의 발로에서이다.

‘만인구원론자들(universalists)’이 말하듯, 단지 인류가 지옥 가는 것이 불쌍해 ‘돌발적인 동정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도 혹은 ‘우연히 믿어(accidental faith)’ 구원 얻을 ‘불특정 다수’를 위해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니다.

그의 ‘자기 희생’은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택정한 그의 자녀들을 위한 ‘부성애적’경륜이었다.

‘하나님의 아들 됨’도 불특정인이 우연히 그리스도를 믿어서가 아니다. 창세 전 아들로 택정된 자들이(엡 1:4)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음으로서다(살후 2:14).

우리의 ‘존재 가치’ 역시 ‘하나님의 희생’을 입어 비로소 발현(發現)된 것이 아니다.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택정된 때부터였고, 그의 희생은 그것에 이어 순차적으로 따라 나온 것이다.

◈감춰진 사랑

‘모성애, 부부애, 형제애’ 같은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감되는 정서들이다. 간혹 사람들이 주위에서 ‘지고지순(至高至純)한 모성애’, ‘금슬 좋은 부부’, ‘자녀의 지극한 효성(孝城)’을 볼 때, 애틋함과 부러움을 갖는 것은 그것들이 인간 사회에서 함께 공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택자’와 ‘하나님’ 간에 공유되는 ‘신적(神的)인 사랑’은 외인(불신자)에게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광신적인 것으로 비쳐질 따름이다. 이는 그것이 인간 사회에선 미증유의 초월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성령으로만 알려진다. ‘하나님 사랑’의 실체인 ‘성자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려진다(롬 5:5).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이(요 15:26) 그에게 없기에,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을 알 수 없다.

이사야 선지자가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 6:9)”고 한 것도, 성자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자들은 성령으로 알려지는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을 알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나님’에 관한 인간의 모든 지식과 ‘경험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알려지는 ‘삼위일체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의 사랑(롬 15:30)’이라 함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으로만 알려진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방점이 ‘성령’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에 있다. 오순절주의자들(Pentecostalists)이 성령을 기형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이 점에서 혼선을 빚은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리의 사랑(살후 2:10)’이라 함도 ‘영지주의자(Gnosist, 靈知主義者)’의 주장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그들 같은 소수의 특권자들만이 ‘진리를 깨닫는(그들 나름의 신비한 통찰력) 사랑’을 입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어 성령으로 말미암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진리의 사랑을 입었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성령의 사랑’도 ‘진리의 사랑’도 알 수 없었던 것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삼위일체 하나님 사랑’도,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도 모르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