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 말씀 성경 사랑한 사람
성공회 교인으로서 성공회 복음주의적 변화 유도
청교도에 푹 빠져 청교도를 전하고 연구와 실천
신론과 구원론에 있어 개혁신학 잘 드러낸 인물

제임스 패커
▲제임스 패커 박사. ⓒTGC
이승구 교수(합신대)가 영국 복음주의 개혁신학자 제임스 패커 교수(James I. Packer)의 소천을 맞아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그의 생애와 신학에 대해 소개했다.

이 교수는 “패커는 제게 있어 늘 매우 조용한, 그러나 영국 교회(the Church of England, 성공회) 안에서 개혁신학적 목소리를 강력하게 외친 사람의 하나”라며 “그는 7살 때인 1933년 9월에 당한 큰 사고로 두뇌에 손상을 입어 항상 수줍어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언급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될 수 있는 대로 논쟁을 잘 하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경우들이 있었다. 이런 논쟁 상황에서 그는 대개 성경적이고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했다”며 “같은 성공회의 복음주의적 ‘학자인 목회자(scholar-pastor)’였던 존 스토트보다 좀 더 온건하고 정통적 입장을 대변했고, 신학적으로 정통파 개혁신학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곳곳에서 잘 제시한 신학자(theologian)였다”고 밝혔다.

패커의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 대해선 “1960년대 격월로 발간되던 <복음주의 잡지> 편집자가 기독교의 기본에 대해 시리즈로 써 달라고 한 것을 5년 동안 기고한 글들의 모음”이라며 “이 책에 그의 거의 모든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전했다.

이승구 교수는 “성경을 아주 중요시면서 성경 외의 어떤 것도 우리 시대의 계시라고 하지 않고, 이 성경에 근거해 참으로 (그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하려고 애쓴다”며 “이 일에 과거 신앙의 선배, 청교도들이 좋은 모범이 됨을 잘 드러내 준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캐나다에 있을 당시인 2002년 밴쿠버 뉴 웨스트민스터 교구 성직자 회의(synod)에서 동성결혼을 주례한 분의 주교됨을 인정했을 때, 패커는 이를 반대하는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그 회의장을 중간에서 떠나왔다”며 “2008년 패커가 속해 있는 교회인 캐나다 성공회에서 가장 큰 회중인 세인트 존스 교회가 캐나다 성공회에서 분리해 보다 복음주의적인 아르헨티나 교구와 하나가 되려 하자, 캐나다 성공회의 교리와 치리를 공적으로 거부한다는 것과, 캐나다 성공회 밖의 다른 종교적 단체와 하나됨을 추구했다는 죄목으로 임직 때 부여했던 말씀과 성찬을 섬기는 목사의 권한을 박탈한다는(revoked) 결정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이에 대해 “패커 자신은 영국에 있을 때나 캐나다에서나 계속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이를 좀 더 복음주의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성공회 자체가 일종의 분열을 한 셈”이라고 평가했다.

이승구 교수는 “패커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가 대학 때 발견한 청교도에 푹 빠져 청교도를 연구하고, 전하고, 자신이 청교도로 살기를 원했다”며 “자신은 누구보다 존 오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면서, ‘후대의 청교도(a latter-day Puritan)’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또 “패커는 특히 신론과 구원론에 있어 개혁신학을 잘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리하여 형벌을 받으셨음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다 강조하고, 신학의 모든 측면에서 개혁신학의 강조점을 잘 드러냈다”며 “그는 참으로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였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이와 같이 철저했던 패커가 찰스 콜슨과 천주교 신부 리처드 노이하우스와 함께 천주교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이를 설명하는 책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함께: 공동의 사명 수행을 위하여>를 펴내 굉장한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다”며 “용어가 명료하지 않아 각기 다른 식으로 이해하면서 같이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끝으로 그는 “이제 우리의 과제는 패커가 제시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을 이 시대에 잘 지켜내는 것”이라며 “패커 같이 신실한 하나님의 신학자를 주셔서 20세기와 21세기 초까지 하나님의 뜻을 잘 붙잡고 갈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해, 패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패커를 불러 주께 이르게 하신 일로 인한 짧은 생각을 마친다”고 했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

제4회 종로포럼
▲이승구 교수. ⓒ크투 DB

제임스 패커(1926-2020)의 소천 소식을 들으면서

좋은 개혁신학자의 한 사람인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1926. 7. 22-2020. 7. 17)가 그의 거주 장소를 이 땅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신 ‘하늘(heaven)’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의 사역에 대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그의 생애와 신학과 그에 대한 여러 생각들을 조금 표현해 보고자 합니다.

패커는 저에게 있어서 늘 매우 조용한, 그러나 영국 교회(the Church of England, 성공회) 안에서 개혁신학적 목소리를 강력하게 외친 사람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7살 때인 1933년 9월에 당한 큰 사고로 두뇌에 손상을 입어서 항상 수줍어하는 성격을 가진 것으로 언급되는 패커는(이에 대해서는 맥그라스가 쓴 패커의 전기를 보십시오. Alister E McGrath, To Know and Serve God: A Life of James I. Packer [London: Hodder and Stoughton, 1997]),

될 수 있는 대로 논쟁을 잘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논쟁의 중심이 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논쟁 상황에서 그는 대개 성경적이고 정통주의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같이 성공회 안에 있던 복음주의적 ‘학자인 목회자(scholar-pastor)’였던 존 스토트보다 좀 더 온건하고 정통적 입장을 대변했으며, 신학적으로 정통파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 지를 곳곳에서 잘 제시한 신학자(theologian)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후에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젠트 컬리지 신학 교수를 할 때는 “리젠트 컬리지 말고는 모든 곳에 편재한다”는 농담 섞인 조크의 대상이 될 정도로 온 세상 곳곳에서 강연하고 논문을 발표했던 그는, 역시 그 수줍어하는 성격 때문인지 우리에게 와서 강연하거나 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기본적으로 패커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의 최초의 책들인 『근본주의와 하나님의 말씀 (J. I. Packer, 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London: IVP, 1958), 옥한흠 역)』, 『근본주의와 성경의 권위(서울: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 1973)』, 그리고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주권(Evangelism and the Sovereignty of God(London: Inter-Varsity Fellowship, 1961))』에서부터 잘 나타나는 그의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성공회 안의 복음주의파를 대변하며 성공회에 복음주의적 영향을 미치기 위해 애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그의 입장은 옥스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1954) 그가 감당한 일들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학위를 하기 전 버밍험에 있는 하-본 히뜨 교회에서 부목사(Assistant Curate of Harborne Heath in Birmingham 1952–1954)를 하였고, 학위 후에 브리스톨에 있는 틴델 홀(Tyndale Hall, Bristol)에서 가르치기를 시작하고(미국과 우리의 조교수에 해당하는 Lecturer, 1955–1961), 옥스퍼드에 세워진 복음주의자들의 연구센터인 라티머 하우스(Latimer House, Oxford)에서 도서관장(1961–1962)과 학감(Warden, 1962–1969)을 했습니다.

다시 브리스톨로 돌어가 틴데일 홀의 학장(Principal of Tyndale Hall, Bristol, 1970)을 하고, 틴데일 홀과 클리프톤 컬리지와 달톤 하우스-세인트 마이클스 등 세 컬리쥐가 합하여 구성된 틴델홀의 부학장(Associate Principal)을 하면서(1971-1979), 영국 성공회 신부들을 교육하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의 라티머 하우스도 그렇지만, 브리스톨의 틴데일 홀도 성공회 안에서 복음주의적인 목회자들을 키워내는 학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쓴 짧은 책들은 다 성경에 근거해 하나님 앞에서 충실하기를 바라면서 쓴 글들이었습니다. 특히 1960년대에 격월로 발간되던 <복음주의 잡지(Evangelical Magazine)> 편집자가 기독교의 기본적인 것들에 대한 시리즈 글을 써 달라고 한 것을 5년 동안 계속 기고한 글들의 모음이, 그의 베스트셀러로 150만부 이상 팔린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 Hodder and Stoughton 1973, reprinted 1993)』입니다.

사실 이 책에 그의 거의 모든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을 아주 중요시하면서 성경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시대의 계시라고 하지 않으며, 이 성경에 근거해서 참으로 (그가 이 책의 앞부분에서 강조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하려고 애씁니다.

이 일에 과거 신앙의 선배들, 청교도들이 좋은 모범이 됨을 잘 드러내 줍니다. 과거의 그들처럼 성경에 근거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면 그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삶을 살며 그런 삶을 살도록 이끄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성경에 대한 그의 확인 때문에 가능했는데, 초창기에도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그는 1978년에 미국의 복음주의자들과 함께 성경의 무오성에 대한 시카고 선언에 서명하고, 같이 선언서를 발표했으며, 그 의미를 설명하는 소책자를 내기도 하였습니다(Freedom, Authority and Scripture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82], 이승구 역, 『자유, 권위, 성경』 [서울: 엠마오, 1983]).

그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그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옹호한 학자입니다. 이것이 그의 가장 큰 기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자에 그의 성경관에 대해 잘못 제시한 것을 비판하면서 패커의 무오성을 믿는 견해를 잘 변호한 논의로 다음 글을 보십시오. William Roach and Norman Geisler, “Misinterpreting J. I. Packer on Inerrancy and Hermeneutics,” available at: https://defendinginerrancy.com/misinterpreting-j-i-packer-on-inerrancy-and-hermeneutics).

둘째로, 그는 기본적으로 성공회 교회인(Churchman)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국에서 태어난 그에게 당연한 것이었지만, 1926년 7월 22일 글로쳐스터셔(Gloucestershire) 북부에 있는 (우리에게는 차로 유명한) 트위닝(Twyning, Gloucestershire)에서 장자로 태어난 그는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그의 부모님을 따라서 그저 매주일 집 가까이에 있는 세인트 캐터린즈 교회(St. Catherine’s Church) 예배당에서 예배에만 참여만 하는 형식적인 성공회 신자였다고 합니다.

14살에 견신례도 받았지만, 이 때도 참된 회개나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가진 것을 아니었다고, 그의 전기 작가들은 패커의 말에 근거해서 말합니다.

그의 회심은 그가 18세 되던 해인 1944년 옥스포드 대학교의 그리스도의 몸 대학(Corpus Christi College)에 고전(classics) 전공의 학생으로 입학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개강한 지 3주가 지난 10월 22일에 그는 세인트 알데이트 교회(St. Aldate Church)의 저녁 예배에 참석했었는데, 나이 많은 목사님의 설교가 지루하다고 느꼈지만 그 후반부에 그 목사님께서 소년일 때 성경 캠프에서 자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도전을 받은 일에 대해 간증할 때 자신을 그 목사님을 동일시하면서 자신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드리기로 결단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영국 교회는 패커라는 이 위대한 자산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고전을 전공하여 문학사 학위를 한 후(1948), 런던에 있는 선교사들을 위한 학교인 옥크힐 신학교(Oak Hill Theological College)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직임(instructor, tutor)을 감당하다가(1948-1949), 영국 성공회 사제를 훈련시키는 기관의 하나인 옥스포드의 위클리프 홈(Wycliffe Hall)에 입학하여(1949) 본격적인 신학 공부를 하고, 1952년에 부제(deacon)가 되고, 1953년에 버밍험 대성당에서 성공회 사제(priest)로 임직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버밍험의 하-본(Harborne)에 있는 센인트 존스 교회에서 부목사직을 수행하면서, 옥스포드에서 리쳐드 박스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습니다(D. Phil., 1954).

죠오지 너트올(Geoffrey Fillingham Nuttall, 1911–2007)의 지도 하에서 그가 쓴 논문은 “리처드 백스터 사상에서의 인간의 구속과 회복(The Redemption and Restoration of Man in the Thought of Richard Baxter)”이라는 400페이지 넘는 논문이었습니다(오랜 후인 2003년 이를 출판합니다(Carlisle: Paternoster Press, 2003)).

그 이후 그는 계속해서 영국 성공회 목사들을 훈련하는 기관에서 가르쳐 왔고, 옥스포드 학부 때부터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지질학자 제임스 휴스턴(James Houston)의 초청에 따라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리젼트 컬리지 신학 교수로 갔을 때(1979)도 캐나다 성공회에 속한 밴쿠버에 있는 세인트 존스 성공회(St. John's Vancouver Anglican Church)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는 어찌하든지 성공회가 점점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가도록 노력하였고, 성공회에 속한 복음주의 파를 대변하는 인물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Cf. J. I. Packer, Guidelines: Anglican Evangelicals Face the Future (London, Church Pastoral Aid Society, 1967); The Evangelical Anglican Identity Problem: An Analysis (Oxford: Latimer House, 1978); Roger T Beckwith과 함께 낸 The Thirty-nine Articles: Their Place and Use Today [Oxford: Latimer House, 1984]).

모든 면에서 좀 더 성경적 방향으로 성공회를 이끌려고 노력하였으니, 예를 들어 직제에 있어서는 상당히 이전 직제를 유지하고 있어 성도들 중에 선출되어 임직한 장로 제도가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면서, 목회자와 함께 치리를 감당한 직분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J. I. Packer and Alan Stibbs, The Spirit Within You: The Church's Neglected Possession (1979), 이승구 옮김, 『그리스도인 안에 계신 성령』 (서울: 웨스트민스터 출판부, 1996)).

그러나 성공회는 계속해서 직제에 있어 이전의 방향을 고집하였고, 전반적으로도 자유주의적이고 더 폭넓은 방향으로 나가서, 패커 등의 이런 노력은 결국 무색해졌습니다.

결국 2002년 밴쿠버의 뉴 웨스트민스터 교구 성직자 회의(synod)에서 동성결혼을 주례한 분의 주교됨을 인정했을 때, 패커는 이를 반대하는 다른 목사님들과 함께 그 회의장을 중간에서 떠나왔습니다.

2008년 패커가 속해 있는 교회인 캐나다 성공회에서 가장 큰 회중인 세인트 존스 교회(St. John’s Shauhjnessy)가 캐나다 성공회에서 분리해 보다 복음주의적인 아르헨티나 교구와 하나가 되려고 하자, ①캐나다 성공회의 교리와 치리를 공적으로 거부한다는 것과 ②캐나다 성공회 밖의 다른 종교적 단체와 하나됨을 추구했다는 죄목으로 임직 때에 부여 했던 말씀과 성찬을 섬기는 목사의 권한을 박탈한다는(revoked) 결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공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거부된 것입니다. 그러자 세인트 존스 교회는 캐나다 성공회 네트워크(the Anglican Network in Canada=ANiC)에 속하였고(Chantal Eustace, ‘Anglican Congregation Votes to Split over Same-sex Blessings,’ The Vancouver Sun (15 February 2008)), 이곳은 다시 2009년 북미 성공회(the 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에 속하였다고 합니다.

패커 자신은 영국에 있을 때나 캐나다에서나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이를 좀더 복음주의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성공회 자체가 일종의 분열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때 패커는 오래 전인 1966년 10월에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께서 ‘복음주위자들의 전국 회의(the National Assembly of Evangelicals)’에서 영국 모든 복음주의자들이 모여 한 교단을 형성하는 것에 대해 제안했던 바를 다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로이드-존스 목사님께서는 성공회 같이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회들로부터 나와서 독립적인 복음주의 교회들의 연합체를 형성할 것을 제안하셨는데, 이 회의 의장 역할을 하던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 공개적으로 반박하시면서 영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의 심각한 균열이 있게 되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패커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그 날 밤에 전화로 이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공회 안에 남아 있으면서 다른 입장을 가진 분들과 싸우면서 영향력을 미쳐 가자는 편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자신도 성공회 대회에서 일종의 면직을 당할 정도로 성공회가 변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년의 패커는 과연 어떻게 생각했을지 궁금합니다.

더구나 자신들의 모든 사역을 마치고 하늘에서 주님의 품에서 로이드-존스와 스토트와 과연 어떤 영적인 대화를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셋째로, 패커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그가 대학 때 발견한 청교도에 푹 빠져 청교도를 연구하고, 청교도를 전하고(그런 대표적 작업들로 다음을 보십시오: J. I. Packer, Among God's Giants: Aspects of Puritan Christianity [Eastbourne: Kingsway Communications, 1991]; A Quest for Godliness: The Puritan Vision of the Christian Life [Crossway Books, 1994]), 자신이 청교도로 살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그는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를 성경적으로 변화시키기 원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는 영국 교회 안에서 영국 교회를 변화시키기 원했던 청교도들을 아주 닮았습니다.

대학 때 (말년의 패커처럼) 거의 실명한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자신의 많은 책들을 옥스퍼드 기독학생회(Oxford ICCU, 현재 IVP의 전신)에 기증하셨을 때, 그 책들 가운데서 청교도들의 작품들을 발견하고, 특히 오웬의 글을 읽었음을 밝히면서 자신은 그 누구보다도 오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며, 자신은 ‘후대의 청교도(a latter-day Puritan)’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조나단 에드워즈를 마지막 청교도라고 말하는데, 그 청교도의 유산을 오늘날 새롭게 드러내는 일에 있어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의 하나로, 우리들은 패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넷째로, 신학 전반에서 그러하지만 특히 신론과 구원론에 있어 패커는 개혁신학을 잘 드러내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리하여 형벌을 받으셨음을 강조하고(What did the Cross Achieve? The Logic of Penal Substitution [Cambridge: Tyndale House, 1973]),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다 강조하고(Divine Sovereignty and Human Responsibility [Pensacola, FL: Chapel Library, 2002]), 신학의 모든 측면에서 개혁신학의 강조점을 잘 드러내는 그는 참으로 이 시대의 대표적인 개혁신학자였습니다.

모든 문제에 있어 그는 개혁파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특히 성령론에서 그가 미친 영향을 매우 중요합니다.

그의 초기 논문이 케직 사경회가 지향하는 성령세례와 소위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주제에 대해 성경적인 입장을 잘 제시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후에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더 폭 넓게 아주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Keep In Step With The Spirit: Finding Fullness In Our Walk With God [F. H. Revell, 1984, reprinted 2005]).

기본적으로 패커는 성령님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알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성경에 가르침에 따라 믿음으로 칭의받은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계속되는 성화를 추구하지만, 이 세상에서 완전에 이를 수 없음을 성경이 증거하며 역사가 증거한다는 것을 잘 제시하여 소위 완전주위(perfectionism)에 대한 성경적 비판을 잘 제시하여 가장 온전한 성경적 성령론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패커는 성령님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며(Life in the Spirit [London: Hodder & Stoughton, 1996]), 결국 성경을 중심으로 사는 삶을 보이면서(Truth & Power: The Place of Scripture in the Christian Life [Wheaton, Ill.: H. Shaw Publishers, 1996]), 특히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나가는 삶의 실제를 잘 제시하고 가르쳐 줍니다.

(J. I. Packer, Decisions – Finding God's Will: 6 Studies for Individuals or Groups [Leicester: InterVarsity Press, 1996]. 성령님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패커의 논의의 대한 좋은 정리 논문으로 Don J Payne, The Theology of the Christian Life in J. I. Packer's Thought: Theological Anthropology, Theological Method, and the Doctrine of Sanctification [Colorado Springs: Paternoster, 2006]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철저한 패커가 미국 복음주의 성도요 교도소 선교회 사역을 하는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천주교 신부요 뛰어난 공적 신학의 선구자인 리처드 노이하우스(Richard J. Neuhaus) 등과 함께 천주교인들과 같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는 문서에 서명하고(이 기본적인 문서는 ‘Evangelicals & Catholics Together: The Christian Mission in the Third Millennium’, First Things, May 1994에 나왔었다.), 이를 설명하는 내용의 책을 편집하여 낸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함께: 공동의 사명 수행을 위하여(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 ECT: Toward a Common Mission)』라는 책에 기고하고(Charles Colson & Richard J. Neuhaus, eds., Evangelicals and Catholics Together: Toward a Common Mission [Thomas Nelson, 2005]), 일정한 영역에서 복음주의자들과 천주교인들이 같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하자 굉장한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습니다.

(가장 강력히 반대하면서 이의를 제기한 제임스 케네디, 존. F. 맥아더, 그리고 R. C. 스프로울(Sproul) 등이었습니다. Cf. "Irreconcilable Differences: Catholics, Evangelicals, and the New Quest for Unity," (2016-06-12), available at: https://web.archive.org/web/20160612134234/http://www.gty.org/resources/Articles/A149/Evangelicals-and-Catholics-Together.).

마치 1966년 스토트와 로이드-존스의 분열 후 성공회에 속한 복음주의자인 패커와 콜린 부하난(Colin Buchanan)이 천주교인들(Anglo-Catholics)과 함께 『연합으로 위한 성장: 영국에서 연합된 교회 형성을 위한 제안들』이라는 책을 내었을 때(Colin O. Buchnan, E. L. Mascall, J. I. Packer, and The Bishop of Willesdem, Growing into union: Proposals for forming a united Church in England [London: SPCK, 1970]),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서 패커와의 관계를 끊고, 복음주의 잡지 이사회에서도 물러나게 하고, 그들이 함께 시작했던 청교도 컨퍼런스를 하지 않게 했던 것과 같은 반응, 아니 그보다 더한 반감들이 곳곳에서 제기된 바 있습니다.

이 문제가 매우 복잡한 것은, 패커가 그가 강조한 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의 칭의 이해에서 조금도 물러선 이해를 표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패커 등이 개혁파적인 칭의 이해에서 물러섰다면 이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강력한 문제제기를 해야 하지만, 칭의 이해에 있어 개혁자들의 이해가 성경적 입장이라는 것이 아주 확고하기에, 이 함께한다는 것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 운동 같은 데서의 함께함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도는 맥아더나 스프로울이나 케네디도 동의하는 바이고, 과연 복음주의와 천주교 사이 신학적인 일치가 있다고 말하고 서명한 것에 대한 문제제기인데, 많은 분들은 사용된 용어가 명료하지 않아 각기 다른 식으로 이해하면서 같이 한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마 이 논쟁이 패커의 삶에서 가장 복잡하게 일어난 논쟁 같습니다. 이제는 이런 논쟁 밖에서 하나님의 품에서 쉬고 있는 패커는 이 땅에 있을 때보다 더 명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과제는 패커 등이 제시한 가장 성경적인 입장을 우리 시대에 잘 지켜내는 것입니다. 그 노력을 다하고 후일에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날 우리도 주께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에 근거해 우리를 받아주실 때 감사해 하면서, 이미 주님 품에서 안식하며 기쁨을 누리는 이 위대한 신앙의 역군들과 같이 유용하고 열매 있는 영적 대화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패커 같이 신실한 하나님의 신학자를 주셔서 20세기와 21세기 초까지도 하나님의 뜻을 잘 붙잡고 갈 수 있게 해 주심에 대해, 패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패커를 불러 주께 이르게 하신 일로 인한 짧은 생각을 마쳐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