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대개 ‘종교’ 하면 사람들은 먼저 인간이 신(神)을 위해 무엇을 바치고 섬긴다는 생각을 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일반의 종교 관념으로 기독교를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신앙’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먼저 한다.

이렇게 될 때 신앙은 부담스러운 고행(苦行)이 되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된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해 주신 것’에 주목한다.

물론 인간의 근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이다. 그러나 이것도 먼저 ‘하나님의 섬김’을 받은 이후에나 가능하다.

하나님의 섬김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려는 것은 서양 속담의 “마차를 말 앞에 두는(put the cart before the horse)” 꼴이다. 타락으로 전적 무능해진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섬김을 받아 살아나야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이 ‘섬김의 순서’를 ‘하나님 먼저(God first)’에서 ‘인간 먼저(Man first)’로 바꿔놓은 것이다. ‘인본주의’를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무능’을 말함이다.

타락은 ‘성경 읽는 순서’도 바꿔놓았다. 인간이 무흠했다면 연대기에 따라 ‘앞의(fore) 창세기’부터 읽어야겠지만(무흠하다면 성경이 필요 없었겠지만), 타락했기에 ‘뒤의(post) 4복음서’부터 앞으로 거슬러 읽어야 한다.

죄인들에게 먼저 가르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의 전적 무능’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은 ‘창조의 하나님’을 먼저 가르치지만, ‘그것’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먼저 가르친다. 먼저 복음으로 살아난 후에라야 하나님의 창조도, 여타의 그의 모든 경륜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기독교의 요절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하신 일’을 말했다.

일반의 종교 관념과는 배치되는 파격이다. 사실 이런 파격이 기독교를 독보적이며 이질적으로 보이게 한다.

다음 구절들은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섬김’을 말해주며, 덧붙여 ‘세상을 향한 우리의 섬김’이 어떠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물론 ‘섬김’의 해석은 ‘신학적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4-7).”

계몽주의자들은 이 예수님의 ‘발씻김(洗足)’에서 ‘서로 낮은 자세로 서로를 섬기라’는 겸손의 미덕을 보고, 로마가톨릭은 거기서 ‘예전(禮典)’을 본다. 반면 복음주의자들은 여기서 그의 ‘구속의 섬김(Serving of Redemption)’을 본다.

그리고 그것의 대구(對句)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마 20:28)”는 말씀에서 본다.

◈높은 자가 낮은 자를 섬김

세상 이치는 ‘낮은 자가 높은 자’를 섬긴다. 사람들은 누가 어떤 사람을 섬기는 것을 보면, 필시 ‘그가 상대방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을 한다.

베드로가 자기의 발을 씻기려는 스승 예수님을 향해 “어찌 내 발을 씻기려 하시나이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나이다”라고 한 것도 그런 세태의 반영이다.

그러나 이미 앞서 언급했듯,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낮고 천한 인간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전적 무능’교리와, ‘있는 자 만이 누군가에게 뭘 해 줄 수 있다’는 가르침 등과 맞닿아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으로 섬겨주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희망이 없기에, 부득불 그들을 섬겨주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발씻김(洗足)’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 ‘구속(救贖, 죄씻음)’의 섬김을 의미하며, 이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만이 죄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섬김’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신의 발을 씻기려 할 때, 베드로가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라며 사양한 것은 그가 예수님의 ‘세족’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드러낸다.

뒤이어 나온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7)”는 예수님의 답변에서 이는 재확증된다. 그가 만일 예수님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예수님이 그의 발을 씻기려고 했을 때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의 발을 그에게 내어드렸을 것이다.

‘나의 하는 것을 이 후에는 알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비로소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과 행동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없다’는 말씀은 ‘발 씻김(洗足)’이 ‘구속(죄 씻음)’임을 다시 한 번 재확인시켜 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죄씻음)’이 베드로를 그와 상관(연합)시켜주기 때문이다.

만일 예수님의 ‘발씻김’이 ‘구속’을 의미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없다’는 말을 안 하셨을 것이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고 안 씻기고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을 향한 섬김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는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행한 ‘발씻김’을 ‘종교 예전’으로 삼아 대대로 전승시키라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이를 왜곡하여, A.D. 694년 톨레도(Toledo) 회의에서 이 ‘발씻김’을 이른바 ‘세족식(maundy, 洗足式)’이라는 ‘교회 의식’으로 채용하여,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실행해 왔다. 이는 그것의 영적, 상징적 의미는 간과한 채, 문자적 의미만 취한 결과였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세족식’을 위대한 ‘구속의 가르침’을 하나의 ‘종교의식’ 혹은 ‘겸양지덕의 도덕적 훈화’로 전락시킨다고 여겨 그것을 폐지했다.

그런데 오늘 일부 개신교에서는 소위 제자훈련, 영성훈련 같은 데서 로마가톨릭 흉내를 내며, ‘구속의 가르침’을 왜곡시킨다.

예수님의 ‘발 씻김’은 오늘 그리스도인의 섬김, 봉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예수님의 ‘발 씻김의 섬김’의 실체가 그의 ‘피의 구속’이었듯,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실체’도 그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부터 우리가 ‘구속의 섬김(Serving of Redemption)’을 받았듯,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 20:23)”는 말씀도 우리에게 세상을 향한 ‘구속의 섬김’을 명하신 것이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그랬듯, 우리에게만 있고 세상엔 없는 ‘구속의 섬김’이어야 한다.

우리가 아니라도 줄 수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세상이 줄 수 있는 은과 금은 없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행 3:6)”라고 했던 ‘예수 이름’, 곧 ‘구속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