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우상숭배의 총화이자, 분명한 범죄이다
몇 해 전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검찰 수사 직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두고, 여러 목회자들이 자신의 이념에 준거해 왜곡된 구원관을 유포하는 것을 바로잡고자 작성한 이영진 교수(호서대)의 글을 다시 소개합니다. 그 이후로도 정치인의 자살은 근절되지 않고 있고, 이를 미화하는 정치적인 정서는 사회를 어둠에 빠뜨리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편집자 주
“자살하면 정말 지옥에 간다는 근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근래 받은 질문이다. 과거에는 ‘자살하면 지옥 간다’라는 금칙이 기독교 내에서 계명으로 각인이 되어왔지만, 지금은 이 금칙이 사실상 붕괴된 것처럼 보인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 자살자가 너무 많아졌다. 둘째, 자살의 양상이 (가령 자기 통제가 불가능한 정신적 공격에 따른 경우 등) 다양하다. 셋째, 영향력 있는 목회자들이 진리가 아닌, 자기 이념에 준하는 발언으로 자살을 사실상 순교로 승격시키고 있는 여파이다.
이 셋 중 앞의 두 가지는 교회가 짊어지고 가야 할 과업이지만, 세 번째는 지탄받아 마땅한 일이다. 저런 목회자들의 발언은 생명과 직결된 이 금제를 해제시키는데 발빠르게 조력할 뿐 아니라, 사실상 중세교회의 면벌부에 상응하는 2차 오판을 양산하고 있음에도 자기 인기에 영합한 무책임한 레토릭을 도무지 그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부쩍 자살과 순교의 경계가 모호해진 진원지가 사실은 이 분들의 입에 있다. 이들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도 자살인가.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금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흔들림이 없다.
성경에 나오는 자살은 총 여섯 장면이다.
가장 처음으로 자살하는 인물은 아비멜렉이다. 기드온의 서자(庶子)로 태어나 배다른 형제 70명을 죽이고 권력을 쥐었으나,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머리를 맞아 절명하기 직전, 여자의 손에 죽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병기병의 손을 빌어 자결한다(삿 9장).
다음은 아히도벨이다. 다윗의 반역한 아들 압살롬에게 다윗을 궤멸시킬 모략을 제시했으나 압살롬이 자신의 계략을 수용하지 않자, 압살롬이 멸망할 것을 직감하고 목을 매 자살한다. 어차피 계략이 수용되지 않았는데 왜 자살했을까. 그는 압살롬에게 아버지의 후궁들을 범하라고 조언한 인물이다(삼하 17장).
그 다음은 시므리이다. 아사 왕을 죽이고 왕이 된 바아사가 북이스라엘을 통치한지 24년 되던 해에, 바아사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바아사를 죽이고 왕이 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7일밖에 왕이 되지 못했다. 강력한 장수 오므리가 깁브돈에서 블레셋과 전쟁을 하다 말고 돌아와 시므리의 쿠데타를 종식시켰기 때문이다. 시므리는 왕궁에 불을 지르고 그 안에 들어가 스스로 타 죽는다(왕상 16장).
그 다음 자살한 인물은 사울이다. 다윗과의 애증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다 블레셋과의 전투 중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자살로 끝맺는다(삼상 31장).
다음은 사울의 병기병이다. 사울이 죽여줄 것을 요구했지만 차마 그리하지 못하여 사울이 자신의 칼로 스스로 자결하자, 이 무명의 병기병도 같은 칼 위에 엎드러져 죽는다.
끝으로 가룟 유다이다. 가룟 유다의 행위에 대한 전승이 네 복음서 각각 공동체의 입장에 따라 약간씩 상이하게 보전돼 있다. 마태는 유다 자신이 스스로 선생님을 팔아 넘겼음에도 정작 법정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자 자살을 결심하게 된 듯한 인상을 남김으로써, 유다 자신의 양가적인 번민을 인상적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마 27장).
신약성서 저자가 당대에 자기들이 체험한 인물 가룟 유다의 종국을, 상기 구약의 자살한 인물들 가운데, 유독 다윗의 정적인 사울의 종말과 가장 흡사하게 유비시킨 것은 유의해서 보아야 할 대목이다.
선택받아 기름부음으로 시작했던 사울이 직제에서 탈락하며 맞이하는 비극적 결말을 가룟 유다의 자살을 통해 읽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모호한 죽음에 대한 단호한 입장이기 때문이다. 즉 자살로는 속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γέεννα)’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는 어록을 직접 받아든 초대교회 설립자들이 규정하는 사후 세계야말로 사후의 진정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마태는 가룟 유다의 사후에 부쳐, 대제사장들이 은전 삼십을 부정한 핏값으로 여겨 성전 금고에서 빼내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 묘지를 삼은 것에 주목했다. 그 밭이 피밭이라 불리게 된 연유를 예레미야의 예언과 결부지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이 있다.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마태의 이 예레미야 예언 인용부를, 사실 스가랴의 예언을 마태가 착각해서 인용한 것으로 여긴다.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슥 11:12-13))
하지만 누가는 행전에서 마태의 인용이 착각이 아님을 보다 선명하게 보충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이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리어져 그들의 말로는 그 밭을 아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여기서 ‘Ακελδαμά(아켈다마)’는 사실상의 하계를 표지하는데, 실제 지리적으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גהנום) 남쪽, 이른바 ‘살육의 골짜기’의 하크-에드-둠[빨간 밭]으로 추정됨을 감안할 때, 이는 보다 명확하게 지옥-‘게헨나(Γεέννα)’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가 앞서 예레미야를 인용했을 때, 그것은 바로 힌놈의 아들 골짜기의 본질을 예레미야가 통찰한 대목을 본 까닭이지, 스가랴의 예언과 혼동한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에 따르면, 힌놈의 골짜기는 본래 (하나님으로 은유된) 토기장이가 (인간으로 은유된) 토기를 부숴버리는 장소인 동시에, 몰렉에게 행하는 인신제사, 즉 자살 행위의 장소와 동일시하는 공간으로서 사악한 우상숭배의 진원지로 여기는 장소였던 것이다.
즉, 자살은 우상숭배의 총화인 셈이다.
이것이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근거이다.
유명인들의 자살을 마치 속죄의 한 양상으로 인준하는 듯한 일부 목회자의 언설과는 전혀 배치되는 것이다. 자살은 속죄의 양식이 아니다.
교회는 자살은 반드시 범죄요 지옥으로 들어서는 명백한 길임을, 성서가 말하는 대로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저서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