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린도후서 1장 8-11절

가나의 혼인잔치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의 가나의 혼인잔치(1563). 
사람은 ‘사막의 무덤’을 만난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마침내 아들이 사막 한가운데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버지,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아들아! 힘을 내거라. 머지않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다시금 길을 갔다. 이게 웬일인가? 사막 한가운데 무덤이 있는 게 아닌가? 그걸 보자 아들은 절망 가운데 주저앉았다.

“보세요, 아버지! 이 사람도 우리처럼 가다가 죽은 거예요. 가다 죽으나 여기서 앉아 죽으나 마찬가지예요.”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을 이렇게 격려했다. “아들아, 여기에 무덤이 있다는 것은 동네가 멀지 않았다는 증거란다. 힘을 내거라.”

결국 아버지 말씀대로 마을이 나타났고, 거기서 안식을 취하게 되었다.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사막의 무덤’과 같은 혹독한 시련을 만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사막의 무덤’ 가운데 아버지처럼 희망을 발견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아들처럼 절망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의 무덤’을 만날 때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절망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라는 상황이 많은 사람들을 절망 가운데 몰아넣고 있다.

사노라면…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 가운데 큰 어려움을 만났을 때 절망하는 것일까? 그것은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어려운 상황이 계속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삶은 무수한 끝에서 시작을 반복하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끝은 종착역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또 다른 출발점이다.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끝이라고 하기 전까지는 아직 끝이 아니다. 우리의 끝은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하는 희망의 시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사노라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오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쩨쩨하게 굴지 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사노라면 흐린 날도 있고 밝은 날도 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언제나 해는 다음 날 어김없이 뜬다는 것이다. 곧 희망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당하면 절망할 수 있다. 코로나19라는 상황 가운데 절망할 수 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좌절은 할 수 있어도, 절망을 해서는 안 된다. 순간적으로 절망할 수 있지만 다시 일어서야 한다. 실패는 있어도 포기해서는 안다.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인가? 암, 에이즈, 코로나19 같은 병인가? 아니다.

그 병은 절망이라는 병이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바로 절망이다. 그래서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을 절망 가운데 몰아넣는다.

이런 측면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결코 절망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무능함을 증명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 8절과 9절 상반부에 이렇게 고백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전 1:8-9)”.

바울이 아시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환난을 당하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환난이 얼마나 심했는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이렇게 죽는구나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큰 환난 때문에 살 소망이 끊어지고 이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나님 뜻대로 살려 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바울에게, 왜 하나님은 이런 환난을 주시는 것일까? 왜 이런 절망을 주시는 것인가?

그것은 곧 인간의 절망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희망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절망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인간의 무능함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한계 앞에 절망한다. 때문에 인간의 절망은 자신의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함이 증명되었다면, 그 무능함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출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출발이 희망의 시작인 것이다.

절망을 절망으로 끝내는 사람들

모든 사람에게 절망이 희망의 시작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다. 절망이 절망으로 끝나는 사람들은 절망 속에 희망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다. 자포자기 한 사람들이다.

이것도 예수 믿지 않는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 할지라도,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고정하지 않으면 절망이 절망으로 끝날 수도 있다.

절망적인 현실을 인정하라

어떻게 하면 절망을 희망의 시작으로 바꿀 수 있을까?

첫째, 절망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절망적인 상황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대로 알리고 있다. 그는 그들이 알기를 원하고 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을 소극적으로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인정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인정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잘못을 했을 때 인정하고 ‘미안합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 쉽지 않다. 요즘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듣기가 힘들다고 한다.

워킹맘인 이준영씨는 이 시대에 ‘미안합니다’가 사라진 원인을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면, 마치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듯한 사회적 풍토 탓’이라고 주장한다.

얼마 전 아파트 입주민에게 폭행과 협박을 당해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 이야기가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아파트 입주민은 명확한 근거가 있음에도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7개의 혐의가 적용되어 구속 입건됐다. 일본 정부가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사과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옥시나 폭스바겐도 마찬가지다.

인정하면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개인과 기업도 있다. 1982년 어떤 사람이 미국 존슨앤존슨사 타이레놀의 캡슐을 열고 청산가리를 넣어둔 일이 있었다. 창산가리가 든 타이레놀을 복용한 환자 7명이 사망했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제조상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존슨앤존슨은 어떤 이유로든 자사 제품을 복용한 이들이 사망한 것에 사과하고 책임지겠다며, 총 2억 4000만 달러 규모의 비용을 들여 시중에 배포된 타이레놀 3,100만병을 전량 수거했다.

사고 발생 후 일주일 이내 수거된 100만병의 타이레놀에 대해 자체 조사를 실시했다. 독극물이 들어 있는 제품은 시카고에서 거둬들인 75정뿐임을 밝혔고, 범인 검거를 위해 10만 달러의 현상금도 거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범인은 검거되었고 사건은 종료되었다.

이런 사건이 하나 터지면 기업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존슨앤존슨의 시장점유율은 사건 발생 이후 6.5%까지 추락했다가, 6개월 만에 32%를 달성해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지금도 타이레놀은 여전히 잘 팔리는 약이다.

존슨앤존슨은 사망 사건이 터졌을 때 변명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 인정했고 사과했다. 사고 해결에 최선을 다했다. 그랬을 때,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의사로부터 중한 병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 반응이 다양하다고 한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잘못 진단한 것 아니냐라면서 따지는 사람도 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끝까지 그 병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다 빨리 다 죽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고백할 것은 정직하게 고백할 때 해결 방법이 생겨난다.

한국 사람들의 이중성

구한말 외교관이자 선교사로 한국에 왔던 알렌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이런 기록이 있다. “한국인들에게서 예스가 노요, 노가 예스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말은 한국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좋으면 좋다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좋으면서도 싫다고 이야기한다.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싫으면서도 좋다고 이야기를 하고 뒤에서 호박씨를 깐다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다. 예를 들자면 부모님들이 어버이날이요, 명절 때 자식들보고 차 막히니까 오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오지 말라고 해놓고선 진짜 안 온다면 섭섭해 한다.

누군가 자기를 칭찬해 주면 대개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아유~ 제가 뭘요?” 하면서 몸을 비비 꼰다. 아니라는 표현이다. 그런데 속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래도 사람 볼 줄 아네!’ 이런 마음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누가 나를 칭찬하면 어떻게 하는가? 즉시 “땡큐” 하면서 감사를 표현한다.

더더욱 서양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은 한국에서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갔을 때이다. 가서 보니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이 차렸다. 그런데 주인이 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이렇게 말한다.

그들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이렇게 차린 것이 많은데 차린 게 없다는 건 뭔지…. 그리고 차린 것이 없으면 적게 먹어야지, 왜 또 많이 먹으라고 하는 것인지…. 도대체 어쩌라는 말인지….

이는 겸손의 미덕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그 이면에는 교만과 은폐의식과 체면의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정하고 기도를 부탁하라

절망한 상황을 맞이했다면, 그 자체를 인정하라. 그리고 그 절망의 문제를 혼자만 끙끙 앓고 있지 말라.

목회자에게 말씀해 주시고 성도들과 함께 나누시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다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부탁하는가? 11절에 보면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절망을 인정할 때, 한계를 인정할 때 그 힘듬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기도 부탁을 할 수 있다. 함께 기도하면 거기에서 희망이 시작된다. 그래서 절망은 결코 절망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 된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둘째, 절망을 희망의 시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9절 말씀을 보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바울은 살 소망을 잃어버리고 ‘나는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고민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깨달음은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어쩌면 그 당시 자신의 능력을 의지해 하나님의 일을 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절망적인 상황을 주시므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함을 일깨워 주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망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사인이다. 소설가인 헤르만 헤세는 이런 말을 했다. ‘신(神)이 우리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절망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그 절망 가운데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역사를 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 우리가 지나치게 믿고 의지하고 있는 줄 들을 하나 둘씩 끊어버릴 때가 있다. 물질의 줄을 관계의 줄, 건강의 줄을 끊어버리실 때가 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구체적인 사인인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 되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 되는가? 하나님이 절망 가운데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이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42편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 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소망을 두라고 말씀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우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시편 121편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이 하시면 마른 뼈도 살아난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대언하라고 하셨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4)”.

실제로 에스겔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대언했고, 생기가 마른 뼈들 가운데 들어가 살아나서 큰 군대를 이루게 된다.

마른 뼈가 살아 있는 사람으로 부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능력의 하나님이 하시니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뀐다. 마른 뼈가 살아있는 사람이 된다.

마른 뼈는 절망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라, 생각지 못한 환난이나 육신의 질병이나 어려움이 닥치면 순간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절망을 절망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절망의 순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상황 가운데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건지시는 분이시다

본문 10절 말씀을 보라.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절망 속에서 하나님만 의지하였던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10)”.

바울은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건지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우리를 절망 중에서 건지셨고, 지금도 건지시고, 앞으로도 건져 주실 것이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절망의 순간은 하나님이 일하실 때다

우리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는 그 순간이 하나님께서 이제 일하실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주저앉으려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시고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다.

시편 37편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으심이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시기에, 하나님의 큰 손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면 우리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나의 부족함은 하나님의 기적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행하셨던 기적이 무엇인가?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사건이었다.

왜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행하셨는가?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우리의 절망이 우리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희망의 시작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절망 가운데 계시는 분이 있는가? 그 절망을 숨기려 하지 말라. 인정하라. 그리고 동역자들께, 하나님께 알려라. 기도 부탁을 하라. 그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하나님의 큰 손을 의지하라. 주께서 일으키실 것이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