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택자와 불택자 간에는 ‘하나님 사랑’이 차이가 있지만, 택자들 사이에선 차이가 없다. 그런데 어떤 성도들은 현세적인 것들을 기준으로 하나님 사랑을 ‘키재기(身高贴)’한다.

상대적으로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하나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우쭐대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의기소침해 한다.

여기엔 ‘현세구복적인 신앙’ 사조와 ‘사랑과 공의에 대한 잘못된 적용’도 한몫 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택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어떤 차별도 없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手心手背都是肉(수심수배도시육)’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 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택자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무차별성’은 한 마디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 ‘의(義, 救贖)’이고, 그 의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엡 1:4-7, 롬 3:24).

흔히 기독교 사랑을 ‘독생자를 주신 사랑(요 3:16)’이라고 하는데, 이를 바꾸어 쓰면 ‘의를 주신 사랑’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심으로 우리에게 이루려고 한 것이 ‘의’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 사랑을 ‘의(義, 救贖)’의 사랑으로 규정했다(사 63:9; 1:27).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도 ‘구속하신 그 사랑을 항상 찬송합니다’라고 노래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도 ‘의의 복’이었고, 그의 후손인 우리 역시 동일한 그 복을 약속받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 3:9)”고 했을 때의 복이 ‘의의 복’이다. 누가 ‘의’를 입었다면, 그는 핵심적인 하나님 사랑을 받은 것이다.

◈차별 없는 의

하나님 사랑의 핵심인 ‘의(義)’는 그것을 받는 모든 택자에게 있어 ‘동일 품질’이다. 그것은 시대와 인종을 불문한다.

운명 직전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십자가 강도의 의(義)나, 평생 율법을 엄격히 고수했던 사도 바울의 의(義)가 차별이 없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의’나 오늘 우리의 ‘의’가 다 ‘동일’하다.

성경에 간혹 ‘의’를 차별하는 듯한 표현들이 나온다. “불 가운데 얻은 것 같은 구원(고전 3:15)”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처럼, 구원에 등급(等級)이 있다는 뜻이 아닌, 상급의 유무(有無)를 말한 것이다.

구원을 받되, 벌거벗은 것과 같은 ‘상급 없는 구원’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불 가운데 얻은 것 같은 구원(義)’이라고, 상급이 많은 ‘순교자의 구원’과 차등지지 않는다.

이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입는 ‘의(義)’가 인간의 ‘행위적 의(Justification of action)’가 일체 배제된, 오롯한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32)”.

이는 보통 사람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위대한 순종들이 있었지만(창 12:1-5; 22:16, 동시에 약점도 많았지만) 그것들이 아브라함의 ‘칭의’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성경의 선언에서도 확인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롬 4:2-3)”.

만일 ‘의’에 인간의 ‘행위적 의(Justification of action)’가 포함된다면, 어렸을 때부터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한 유대인들이 받은 의(義)와 평생 율법 없이 살았던 이방인들의 의(義)는 달라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의 원천’이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사실 역시, ‘의의 차별’을 용인할 수 없게 한다. 성경은 ‘의’를 오직 ‘그리스도’와만 연관지우고(롬 3:24, 갈 2:17), 때론 둘을 동일시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리스도가 유일한 의(義)일진대, 그를 영접한 이들의 ‘의(義)’ 역시 모두 동일한 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단번의 구속’으로(히 7:27; 9:26; 10:10) 성취된 ‘의’가 믿는 이들에게 ‘단번에, 전부’ 주어진다는 점에서 ‘의의 차별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보다 백배 더 훌륭해지고’, ‘우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전 13:3)’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더 받아낼 의’는 없다.

반면 우리가 지금보다 ‘백배 더 형편없어진다 해도’ 이미 받은 ‘의’가 취소되거나 빼앗기지 않는다. 영원에 연원(連原)하여 ‘단번에’ 주어진 ‘의’는 다시 거둬들여 질 수 없다.

반면 ‘일심판결(一審判決, 처음 믿었을 때)’ 때 주어진 ‘의’가 종말의 조사심판(調査審判)이라는 ‘결심 공판’ 때 확정된다고 가르치는 안식교나 로마 가톨릭의 ‘의’는 원천적으로‘품질의 차등’을 배태한다.

◈사랑의 차별이 아닌 달란트의 차이

‘하나님의 의’를 가졌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 전부를 가진 것이다. 이 ‘의(義)’외에 ‘소유의 유무다소(有無多少)’같은 것에 의해 하나님 사랑은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들의 차이는 단지 ‘은사의 차이’일 뿐이다.

‘달란트 비유’도 그것을 말한다(마 25:14-22). 여기에 등장하는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사랑을 많이 받았고’, ‘두 달란트 받은 자’는 사랑을 ‘적게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주권자 하나님이 각자의 능력 따라 시여하신 ‘은사(恩賜), 직분(職分)의 차이’를 말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말한 “금그릇, 은그릇, 나무그릇, 질그릇의 차이(딤후 2:20-21)” 역시 ‘구원(義)의 등급차이’를 말한 것이 아닌 ‘은사, 직분의 차이’이다.

누가 더 귀중하고 큰 것을 맡았다고 우쭐해할 수 없음은, 하나님은 많이 맡긴 자들에게서 더 많이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눅 12:48).

그러나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현세적 소유’를 ‘은사’로 보기보다는 ‘복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들은 ‘구원’은 예수 믿으면 기본으로 다 받는 것이니, 복을 논할 땐 그것은 논외로 치고, ‘소유의 유무다소(有無多少)’로 결정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소유의 유무다소’가 복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은 하나님이 만물을 ‘택자의 소유’로 돌렸기 때문이다.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니라(고전 3:21)”. 이 말씀은 택자의 공유물인 ‘만물’을 얼마나 소유했느냐로 그들의 복이 결정될 수 없음을 함의한다.

이 ‘만물의 소유권’은 흔히 상상하듯, 세상의 물질, 건강, 권세, 명예를 택자가 다 소유했다기보다는 전지(全知)하신 주권자로부터 그것들을 필요적절히 허용 받았다는 뜻이다.

그 ‘만물’에는 ‘돈, 권세, 명예’ 같은 ‘부드러운 것들(soft things)’로부터 ‘가난, 질병, 낮춤’ 같은 ‘거친 것들(rough things)’까지 다 포함된다(그런데 사람들은 대개 ‘만물’에 ‘가난, 질병, 낮춤’같은 ‘거친 것들’은 배제시키고 ‘부드러운 것들’만 포함시킨다).

이로 보건대,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고전 3:21)”는 말씀은 만물에 대한 ‘소유 개념’보다는 ‘배분(配分)의 적실성(the Adaptability of distribution)’ 개념이다. 쉽게 말하면 택자의 필요와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거친 것, 부드러운 것’을 포함해 만물을 적시 적소에 동원해 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회개시키려고 ‘풍랑, 큰 물고기’를 동원했고(욘 1:7-11), 엘리야 선지자에게 떡과 고기를 먹이시려 ‘까마귀’를 동원했다(왕상 17:6).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자신의 하나님 됨을 그에게 가르치시려고 그의 그물에 ‘물고기들’을 모아 넣으셨다(눅 5:4-8).

하나님은 택자의 필요를 위해 ‘만물’을 적시적소에 동원하는 ‘배분(配分)의 적실성(the Adaptability of distribution)’을 통해, ‘만물이 성도의 것(고전 3:21)’임을 증명해 보이셨다.

마지막으로 성도를 위한 하나님의 ‘만물 경륜’이 나름대로 유의미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은사’요 ‘현세적 필요’를 위한 ‘배분의 적실성’에 한(限)할 뿐, ‘영원’과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원(連原)한 ‘의(義) 사랑’에 비할 바 못 된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이 외엔 없다.

그리고 이미 말했듯, 그 사랑은 우리가 처음 믿었을 때 이미 우리에게 몽땅 다 왔다. 그에겐 후일 우리가 당신 마음에 들면 주시려고 아껴놓은 사랑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그 ‘아껴놓은 사랑’을 기대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아내지 못한 때문이라 생각하며 하나님께 열심히 아부한다. 헛된 기대이다.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고 지금 그가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으라.

“나는 너를 위해 피와 물을 다 쏟았다. 내게서 뭘 더 바라느냐? 더는 없다. 내 살과 피를 받아먹으라. 성령을 받으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