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초심… 규모 아닌 목회 철학의 문제
대안 주고 싶었다면, 충분한 근거들과 공감 필요
제도권 교회에 신선하고 희망적인 상상 제공하길

이교도의 신학교육을 넘어

이교도의 신학교육을 넘어

진 에드워즈 | 박인천 역 | 대장간 | 192쪽 | 10,000원

제도권 교회에 대한 염려와 비판은 언제나 있어 왔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중세 시대 교회가 강력하게 제도화되면서 여러 폐해가 나타났고, 종교개혁 시대 극에 달한 염려와 비판이 터져 나와 결국 제도권 교회를 탈피하게 되었다.

대부분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 선봉에 선 자들이 제도권 교회를 개혁한 개신교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하지만, 당시 재침례파, 오늘날 프랭크 비올라 같은 이들은 종교개혁의 한계를 지적하며 손댈 필요가 없는 가장 순수했던 교회, 신약 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이교도의 신학교육을 넘어>라는 책을 쓴 진 에드워드도 후자에 속한다.

진 에드워드는 본래 성경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 설명하는 재주가 뛰어난 저자이다.

<세 왕 이야기(예수전도단, 2001)>, <3호실의 죄수(좋은씨앗, 2003)>, <이야기 사도행전(좋은씨앗, 2005)>, <블루 칼라 예수(미션월드, 2006)>, <이야기 갈라디아서(생명의말씀사, 2007)>, <이야기 로마서”(생명의말씀사, 2007)>, <디도의 일기(생명의말씀사, 2015)>, <신의 열애(죠이선교회, 2016)>, <디모데의 일기(생명의말씀사, 2017)>, <실라의 일기(생명의말씀사, 2018)>, <브리스길라의 일기(생명의말씀사, 2019)> 등 성경을 기반으로 쓴 그의 많은 책은 익숙한 성경 역사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상상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이교도의 신학교육을 넘어>는 에드워드의 대표적인 작품들과 성격이 매우 다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남들이 하지 않았던 대담한 일을 하겠다고 처음부터 선언했다.

그 일은 바로 기존의 신학 교육이 이교도에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과감히 버려야 하고,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부제: 바울의 방식을 따를 것인가? 현대 신학교의 교육방식을 따를 것인가?).

디도 실라 일기
▲바울의 1·2차 전도여행을 다룬 <디도의 일기>와 <실라의 일기>.

에드워드의 특장점은 뛰어난 표현력과 풍부한 상상력이지만, 이 주제로 위에서 밝힌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글을 쓴다면 풍부한 상상력보다는 풍부한 참고자료가 필요하다.

현대 신학교 교육이 이교도에서 온 것임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요구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또 바울이 복음의 동역자들을 어떻게 가르쳤는지 성경 본문과 전승 등을 부지런히 연구하여 납득할 만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그래야 저자가 의도했던 반응을 독자에게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현대 신학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갖게 하고, 성경적 제자 훈련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 책엔 단 하나의 각주(참고 문헌 관련)도 없고, 참고한 자료에 관한 정보도 전무하다.

제도권 교회의 문제는 현대 교회 안팎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다. 가령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 신학교 졸업장과 목사고시를 통과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먹이고 인도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는 참으로 심각하다(어떤 사람은 대한민국은 원하기만 하면 목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중세 시대 권력과 결탁한 교회가 온갖 부패와 비리를 눈감고 세상과 같은 논리와 법칙으로 운영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제도권 교회는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심각한 도덕적 문제를 내부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브리스길라 디모데 일기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을 다룬 <브리스길라의 일기>와 <디모데의 일기>.

신학교는 어떠한가? 그리스도와 그 분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자는 단순한 목적이 철저히 학문적인 목적으로 변질되면서,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 수 있을까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정말 역사적 인물인지, 그 분이 하신 말씀 중 어느 정도를 실제로 가르치신 내용으로 분별할 수 있을지를 논하고 있다. 학문의 자율성이란 이유로 그리스도가 죄라고 명하신 것을 포용하는(가령 동성애) 문제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진 에드워드가 지적한 문제는 일리가 있다. 신학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분의 말씀을 배우는 목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저자의 말대로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이교 철학이 아카데미아에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제자훈련은 제도화된 학교에서 여러 불필요한 견해와 이론을 통해 지식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생활과 실제 사역에 동참하는 것으로 앞선 일꾼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 옳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배워야 할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 그대로 순종하고 또 다른 이들을 훈련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열두 사도를 훈련하신 것처럼, 바울이 여러 믿음의 아들을 훈련했던 것처럼, 또 다른 그리스도의 군사를 세우는 것이 교회나 학교 안에서 일어나야 할 올바른 훈련 과정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의 생각을 끝까지 따라가 긍정적인 면을 찾고 유익을 누릴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첫째, 저자의 문체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점에 있고, 둘째, 저자의 극단적 주장에 비해 근거 자료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대형 교단이 아닌 독립 교회에 속하여 30년간 한 교회에서 배웠고(저자가 이상적이라고 말한 것처럼) 동시에 LA 마스터스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지만, 저자가 말한 심각한 문제점에 대부분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학교 수업은 항상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났고, 교수들은 학생들의 영적 건강을 진심으로 위하며 특별히 소수로 관리하는 수업을 매 학기에 갖도록 했다.

자유주의에 기반한 여러 이론을 강력히 비판했으며(진화론 포함), 대부분 성경을 성령이 의도하신 의미 그대로 설명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하는 과정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저자도 신학교를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가르친 교수님께 이 책을 헌정한다. 본론에서 강력하게 비판하는 신학교에 저자가 나온 학교도 포함되는가? 저자가 그 학교에서 경험한 것이 부정적인 면이 많았던 것일까? 의문이 든다.

진 에드워드 진 에드워즈
▲저자 진 에드워즈. ⓒ유튜브 캡처

결국 제도권 교회나 신학교의 문제는 제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사람에게 있다.

케빈 드영이 <왜 우리는 지역교회를 사랑하는가(부흥과개혁사, 2010)>에서 프랭크 비올라를 비판하며 말한 것처럼, 초대교회는 빠른 시일 내에 제도권 교회가 되었다. 3천의 제자가 더해진 후, 교회는 120명일 때와 같을 수 없었다.

에드워드나 비올라가 꿈꾸는 주님의 방식과 사도들의 방식은 규모가 갖춰진 교회에서 온전히 시행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래서 제자화 그룹을 만들거나 셀 조직, 가정 교회 등을 만들어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 때 중요한 것은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목회 철학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만일 저자가 원하는 규모의 교회(가령 가정교회)만이 이상적이라서 나머지는 ‘제도권 교회’로 치부하고 변질되고 타락한 이교도의 영향을 받은 교회라고 명명한다면, 참으로 교만하고 무서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2천년 교회사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신 부분을 모두 평가절하하고 땅의 교회가 온전할 수 없다는 한계를 부정하면서, 자신들이 유지하고 추구하는 교회나 신학 교육의 모습만이 이상적이고 성경적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 딱 알맞기 때문이다.

규모가 있는 교회 속에서 대안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유익을 주기 원한다면, 저자는 훨씬 더 정교하고 분석적으로 충분한 근거와 공감을 가지고 책을 썼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 에드워드가 쓴 상상력 가득한 신앙소설처럼, 이 책을 통해서도 제도권 교회와 교육에 익숙한 우리에게 신선하고 새로운, 그리고 희망적인 상상을 하게 만들기를, 그렇게 이 책이 사용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유평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