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피난한 남대문교회 성도들 주축 설립
교회 이름, 남대문교회와 대신동에서 한 자씩
전쟁 중 교회로 빛 보여 주셨듯, 코로나19도…

남대문교회 남신교회
▲대구 남신교회 방문단이 옛 세브란스 모형을 보며 남대문교회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남대문교회

6.25 전쟁 70주년을 하루 앞둔 6월 24일 오후, 서울 남대문교회(담임 손윤탁 목사)에서 ‘특별한 수요예배’가 드려졌다. 바로 대구 남신교회와 ‘6.25 70주년 기념예배’를 함께 드린 것.

이번 연합예배는 6.25 전쟁으로 피난지 대구에서 설립된 교회가 창립 70주년을 맞아, 믿음의 시작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준비되었다.

남신교회(담임 김광재 목사)는 예장 통합 경북노회에 소속돼 있다. 이 교회는 70년 전인 지난 1950년 6.25 사변으로 남하한 서울 남대문교회 성도 50여명이 대구시 종로구 고여위 박사 사택에서 이운형 목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시작됐다.

남신교회 이름도 서울 남대문교회의 ‘남’과 교회 장소인 대신동의 ‘신’을 합한 것이다. 남신교회의 표어는 ‘오직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꿈꾸는 행복한 교회’이다.

이날 예배에서 대구 남신교회 김광재 목사는 사도행전 8장 1-8절 말씀을 본문으로 ‘박해로 피난 교회 설립’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김 목사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이 박해를 받으면서 이를 피하여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복음을 전한 것처럼, 남신교회도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해 서울을 떠난 신실한 성도들의 예배 처소로 시작됐다”며 “전쟁의 재앙에서 교회를 세워 세상에 빛을 보여 주신 것처럼, 70년이 지난 지금 온 세계에 퍼진 코로나19라는 재앙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성찰하는 기회로 만들자”고 강조했다.

남대문교회 남신교회
▲6.25 전쟁 70주년 기념 서울 남대문교회와 대구 남신교회 연합예배 후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남대문교회

예배 후에는 대구 남신교회 방문단과 남대문교회 교인들과 간담회도 진행됐다.

남대문교회 손윤탁 목사는 “전쟁 가운데 의지할 곳도 기대할 것도 해결할 방법도 없었을 때, 우리 선진들은 함께 모여 예배에 힘썼다”며 “70년이 지난 지금, 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복음을 찾아 온 대구 남신교회가 산 증거”라고 말했다.

손 목사는 “코로나19 상황을 겪으면서, 교회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다”며 “우리는 서로를 돌봐야 하고, 치유와 화해를 위해 일해야 하며, 반목과 불신의 세상을 향해 가르치고 치유하고 선포하는 교회의 사명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6.25가 만든 대구 남신교회와 서울 남대문교회

남대문교회사 기록에 따르면, 남신교회는 1950년 10월 초 대구로 피난 온 남대문교회 성도들이 세운 교회다. 대구로 피난와 있던 남대문교회 이재명 집사는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데도 오갈 데가 없자, 아내와 어린 딸을 데리고 당시 계성학교 교목이던 이운형 목사의 사택을 찾아갔다고 한다.

이운형 목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 피난민 가족을 따뜻하게 맞이했다. 이후 이 집사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역시 피난 온 남대문교회 교인들을 더 만나면서, 교인들의 모임이 형성됐다.

그러다 ‘성탄절 예배는 함께 드리자’고 다짐했다. 1950년 12월 25일 성탄절을 맞아, 대구로 피난왔던 교인들은 이운형 목사를 모시고 대구시 종로구 고여위 박사(최경준 집사) 집에서 감격적인 첫 성탄절 예배를 드렸다.

이 예배를 계기로 최경준 집사 사택은 자연스럽게 피난 교인들의 연락처 겸 모임 장소가 됐다.

남대문교회 남신교회
▲대구 남신교회 방문단이 서울로 7017에서 남대문교회를 배경으로 기념촬영하고 있다. ⓒ남대문교회

이후 대구 피난 교인들은 수시로 모여 성경공부도 하고 피난 온 목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리며 신앙생활을 하고 외로움을 달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인 수가 늘면서 규모 있고 격식을 갖춘 예배에 대한 욕구가 생겨, 의논 끝에 설교자를 정식으로 모시고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이에 1951년 10월 19일부터 이운형 목사를 정식 설교 목사로 세워 예배를 드렸다.

대구 피난 교회가 계속 성장해 개인 가정에서 예배드리기 힘들어지자, 적당한 예배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1952년 6월 25일부터 당시 대구에 와 있던 총회신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총회신학교의 교수이자 남대문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치선 목사의 협력을 얻었다. 예배당 이전 후에도 김치선 목사는 대구 피난 교회에 어느 정도 협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배명준 목사가 서울과 대구와 부산을 오가며 목회했고, 대구 피난 교회 교인들에 대한 심방은 김선경 전도사가 도맡았다.

남대문교회의 대구 피난 시절은 1953년 가을, 배명준 목사와 김선경 전도사가 10여 가정의 남대문교회 피난 교인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오면서 마무리됐다.

서울 식구들이 떠나고 남아 있던 대구 피난 교인들은 이운형 목사와 함께 교회 재건을 논의하고, 성전을 건축하기로 뜻을 모아 대구시 대신동 292번지에 대지를 마련해 1953년 12월 1일 착공을 시작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54년 5월 16일 ‘남신교회’라는 현판을 단 새 예배당 입당예배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남대문교회는 이날 코로나19 극복을 위한 사회적 노력에 동참하고 참석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연합예배 동안 △전 교인 마스크 착용 의무화 △비접촉식 체온계 비치 △전 교인 및 참가자 도착 즉시 체온 측정 △프로그램 전후 실내 방역 실시 △행사장 내 손 소독제 비치 등 체계적인 위생 관리를 진행하고 철저한 방역에 만전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