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예배 제재
▲이 사진은 본 설교문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크투 DB
본문: 창세기 32장 24-32절


우리나라는 말에는 양면성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이 많다. 정이 많아 콩 한쪽도 나누어 먹는다는 옛말이 있다. 정이 많기 때문에 ‘우리’라는 표현을 유난히 많이 한다.

‘우리 가족,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아이들, 우리 집, 우리 교회, 우리나라’ 이런 표현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동체의식이 강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도 ‘우리’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이라고 표현해 줄 때 기분이 좋다.

‘우리’라는 말에는 함정이 있다. 양면성이 있다. ‘우리’라는 말에는 포괄성과 편협성이 같이 내재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을 모두 하나 되게 하는 포괄적인 ‘우리’도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지역감정이나 종교나 이념에 따라 편 가르기를 하는 편협한 ‘우리’로 빠질 위험이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을 보라. 전 국민이 두 편으로 나누어진 것 같다. 진보와 보수가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다. 인터넷상에서는 더 하다. 인터넷 상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글을 보면 저주에 가까운 악플을 단다.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가 들어와 성도들끼리도 편 가르기를 하고 있다. 신념이 신앙 위에 있는 성도들이 있다.

한국교회 가운데는 ‘우리 교회 우상’에 빠진 교회들이 있다. 다른 교회가 어떻게 되든, 우리 교회만 괜찮으면 된다고 말한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우리 교회만 괜찮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된다 해도, 우리 교회에 손해가 되면 안 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 우상’에 빠진 모습이다. 이 땅 모든 교회들은 하나님의 교회다. 함께 울고 함께 웃어야 하는 교회다. 우리는 편협적인 우리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하나 된 우리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 된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

함께 서기보다 앞서해야 할 것은 홀로서기다

우리가 더불어 살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홀로서기다. 많은 명 가사를 남긴 작사가인 김이나 씨는 《보통의 언어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당연히 외롭다. 인간은 어찌 되었든 혼자다. 우리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끔 착각을 한다. 각각 혼자인 채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갈 뿐인데 마치 둘 또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이 기본 값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나만 동떨어진 무리 속에 있을 때 문득 외로움을 느낀다.”

박재순의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에도 이런 글이 있다. “남이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없다.‘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고 내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나답게 될수록 더불어 사는 길로 가게 된다. 그런 점에서 홀로 하는 것이면서 온 세상과 더불어 하는 것이다.”

정채봉 시인도 이렇게 말한다. “자신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홀로 서는 것이다. 자신이 홀로 설 수 있을 때 참된 벗을 가질 수 있다. 혼자서도 무엇을 할 수 있는 이가 자신 있게 살 수 있다. 혼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만이 남과 더불어 있을 수가 있다.”

함께 서기보다 앞서 해야 할 일은 홀로서기다. 홀로서기가 안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서기가 힘들다. 짐만 되기 때문이다. 홀로서기가 된 사람이 마음을 모아 함께 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나온다. 하지만 오합지졸의 군대는 아무리 많이 모여도 소용이 없다.

숲에 가 보면 나무들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홀로 서 있다. 동시에 함께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가 각각 홀로서기를 하지 않고 있으면 아름다운 숲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홀로서기가 된 나무가 함께 모여 아름다운 숲을 이룬다.

가정도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홀로서기를 할 때 아름다운 가정을 이룰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는 목사로서, 직분자는 직분자로서, 성도는 성도로서 홀로서기가 제대로 될 때 교회는 든든히 서게 된다.

인생은 홀로서기다

혼자 있으면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다. 사회생활을 하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괜찮은데, 혼자 있으면 공허해 한다. 불안해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어쩌면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직면하기 때문이 아닐까? 홀로 있을 때 자신의 민낯이 드러나니 싫은 것이다. 엉망진창인 자신 내면의 모습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을 피해 홀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자신만의 공간으로 도피를 한다. 깊은 산속으로 도피하기도 하고, 가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둘 다 문제다. 홀로서기를 잘해야 한다. 홀로서기를 잘 할 때, 함께 설 수 있다. 인생은 홀로서기다. 인생뿐만 아니라 신앙도 홀로서기다.

에서로 인해 두려워 떠는 야곱

야곱은 고향인 브엘세바를 떠나,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간다. 눈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챈 이유 때문에 형의 복수의 칼을 피해 도망가야 했다.

타향살이의 세월이 20여년이 흘렀다. 야곱은 20년 만에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삼촌 라반의 집을 도망쳐 나온다. 고향을 향한 발걸음은 기쁨보다 무겁기만 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 청산되지 않은 형과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자기보다 앞서 종들을 형 에서에게 보내 은혜입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종들은 에서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러 오고 있다고 했다. 야곱은 이 이야기를 듣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오고 마음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공포가 몰려왔다.

야곱은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야곱은 나름대로 작전을 세운다. 먼저 자기와 함께한 종자와 가축을 두 떼로 나눌 것을 생각했다.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도망을 치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야곱은 뇌물 작전으로 변경했다. 에서에게 줄 엄청난 짐승을 준비한다. 짐승들을 세 떼로 나누었다. 세 번에 걸쳐 에서를 위한 뇌물을 준비하면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작전대로 야곱은 에서에게 줄 예물과 종들을 먼저 보내놓고 잠을 청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완전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에서가 이 밤에 당장이라고 쳐들어 와서 자신과 가족들을 모두 죽일 것만 같다.

야곱의 홀로서기

야곱은 한밤중에 일어나, 자고 있는 두 아내와 식솔들을 깨워 얍복강을 먼저 건너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시킨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 홀로 남았다.

지금까지 야곱은 험난한 세월을 지났다. 숱하게 어렵고 힘든 밤을 많이 보냈다. 하지만 야곱에게 오늘 밤보다 힘든 밤은 없었다. 두 아내도 열한 아들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세상에 나 혼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 때 야곱은 철저히 혼자임을 자각한다.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홀로서기를 한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다

신앙은 왜 홀로서기인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단독자로 서야 하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집단의 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를 ‘단독자(單獨者)’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집단으로 서는 것이 아니라 단독자로 서야 한다. 예전에 나는 목사로서 예배를 인도해야 하기에 예배 인도자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이런 음성을 주셨다.

“나는 예배인도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자를 원한다. 나는 너의 예배를 원한다.” 이 음성을 듣고 부터는 예배 전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고 있지만,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인과 아벨이 함께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배만을 받으셨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 4:4-5)”.

하나님 앞에서 같이 예배를 드린다고, 하나님이 그 예배를 다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같이 예배를 드리지만 각자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예배는 안 받으실 수도 있다.

각자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홀로선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믿음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각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분은 나의 아내가 믿음이 좋기 때문에 아내의 치맛자락만 꼭 잡고 있어도 천국 갈 수 있다고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아내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믿지 않는 남편이 천국에 덤으로 따라 가는 경우는 없다.

부모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믿음 없는 자녀들의 손을 붙잡고 천국을 통과할 수 없다. 남편의 믿음과 아내의 믿음은 별개다. 부모님의 믿음과 자녀의 믿음은 별개다.

목사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목사라는 직함이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목사만 그런가? 내가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천국이 보장된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다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 우리의 직분이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 또한 목사의 자녀이기 때문에 천국이 보장된 것이 아니다. 직분자의 자녀이기 때문에 천국이 보장된 것이 아니다. 솔직히 목사의 자녀이기 때문에 천국이 보장되면 좋겠다. 그럴 수 없다. 목사의 자녀라도 믿음이 없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

각자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믿음을 대신해줄 수도 없다. 옆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울 수는 있지만,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도울 수는 있어도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위기 상황일수록 신앙의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위기의 순간이 오면, 사람은 두 가지로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다. 둘째, 위기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생각지도 못한 위기 상황 가운데 놓여있다.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작은 바이러스 앞에서 무너져버린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해야 한다.

죽음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인생을 고백하며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나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어려운 상황일수록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오히려 코로나19로 더 위축되고 함께 예배하지 않음으로 나태해질수 있다. 심지어 믿음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위기 상황 가운데 무너지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를 될 수는 없다. 하나님 앞에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어쩌면 코로나 19라는 상황이 알곡과 가라지를 가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홀로 선다는 것은 뿌리는 내리는 것이다

홀로 선다는 것은 뿌리를 내리는 것과 같다. 나무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뿌리다. 나무가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 가지를 뻗을 수도 없다. 꽃을 피울 수도 없다.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강한 바람이 불면 순식간에 뽑힐 수도 있다. 하지만 뿌리를 깊이 내린 나무는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땅에서 영양분을 빨아들여 나무에게 공급해 줌으로 인해 꽃도 피고 열매도 많이 맺게 된다.

신앙의 홀로서기를 잘 한 사람은 뿌리를 잘 내린 나무와 같다. 신앙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신앙을 통해 나의 삶은 성장하게 된다. 인생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홀로 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훈련이다

홀로 선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홀로서기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훈련이 필요하다.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다. 독수리가 하늘의 제왕일 수 있는 것은 철저한 훈련 때문이다. 독수리는 주로 험한 바위 틈 절벽에 둥지를 만든다. 그 곳에 한두 개의 알을 낳아 새끼를 깐다.

새끼가 6개월 정도 자라면 그 때부터는 어미의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된다. 어미 새는 새끼를 등에 업고 하늘 높이 올라가 높은 곳에서 떨어뜨린다. 새끼 새는 날아보려 날갯짓을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어미 새는 새끼가 땅에 거의 닿을 때쯤 쏜살 같이 내려와 새끼를 낚아채 등에 업고 높은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 그리고 또 다시 힘차게 내던진다.

이러한 훈련을 수없이 반복한다. 새끼 독수리는 이 훈련이 너무 싫다. 그동안 둥지 안에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만을 맛있게 받아먹고 낮잠이나 즐기던 새끼 독수리에게는 너무 고되고 무서운 훈련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돌변한 어미 새가 야속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어미 새는 적당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훈련 없이는 새끼 독수리가 스스로 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늘의 제왕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고된 훈련을 시킨다.

이런 훈련을 수 없이 반복하다 보면 어느 듯 새끼 독수리의 날개에도 힘이 생겨서 날 수 있게 된다. 결국 어미의 도움 없이도 푸른 창공을 멋지게 날 수 있게 된다.

조그만 둥지가 전부인 줄 알았던 새끼 독수리는 더 넓고 광활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새들의 왕자로 홀로서기를 하게 된다.

아이는 넘어짐을 통해 홀로서기를 한다

아기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도 수없이 넘어진다. 넘어져서 다치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부모는 넘어지는 아이를 곧바로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다. 혼자서 일어나라고 격려만 해준다. 그렇게 해야 아이가 홀로서서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일어나는 법을 배운다. 넘어지지 않고 홀로서는 아이는 없다. 넘어지는 훈련을 통해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혼자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는 누구보다 혹독하게 아이에게 홀로서기 훈련을 시킨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떠나간 이후에도 남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키우기 위해서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소원은 자식보다 하루라도 더 늦게 가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이 너무나 힘들지만, 홀로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혹독하게 훈련을 시킨다. 장애아뿐만 아니라 중도에 장애인 된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홀로서기

사고로 시각장애인이 된 아내를 둔 남편이 있었다. 남편은 늘 아내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어디를 가든지 동행했다. 어느 날 문득 남편은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죽고 없으면 아내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면서 아내와 함께 동행하지 않았다. 아내는 이제 혼자서 흰 지팡이를 의지해 다녀야 했다. 남편이 도와주었을 때는 생활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지만, 남편이 도움이 없어지자 모든 것이 힘들어졌다.

길을 걸어다가 부딪치기도 하고 넘어지게 했다. 그럴 때마다 울면서 남편을 원망하며 속상해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이 없어도 조금씩 스스로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타는데 운전기사 아저씨가 아내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주머니는 참 행복하시겠습니다. 남편이 언제나 함께 해주니까 말이에요.” 아내는 그제 서야 남편이 자신의 뒤에서 항상 동행했다는 것을 깨닫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아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달려가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내가 남편을 원망할 때도 홀로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아내를 향한 남편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홀로 설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홀로세우기 위해서 훈련시키신다. 때로는 훈련이 힘들고 어렵지만 스스로 이겨내야 하기에, 하나님은 그냥 지켜보고 계신다.

정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주신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완전히 바닥이었다. 철저하게 자신의 민낯을 다 드러냈다. 두려움과 공포에 싸여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은 야곱을 찾아가 주셨다. 야곱에게 이겼다고 선포해 주셨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져주신 것이다.

야곱은 철저한 외로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홀로서기를 한다. 그리고 에서를 만났을 때 야곱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을 뵈오니 하나님을 뵈옵는 것 같다고 말을 한다.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헌 목사님은 《끝에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홀로 있게 하시는 것은 외로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외로움은 하나님과 독대하기 위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우리는 외로움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외롭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 제자들을 부활 이후 찾아가신다. 그들이 신앙적으로 홀로 서는 것을 돕기 위해 찾아가셨다.

홀로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께서 도와주신다.

신앙은 홀로서기다. 어느 누구도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 믿음을 대신할 수 없다. 사랑하는 남편도 아내도 대신할 수 없다. 부모가 대신할 수 없고 자식이 대신 할 수 없다. 각자의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홀로 선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 ⓒ크투 DB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