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세상에 ‘믿음’이라는 말처럼 흔한 말도 없고, 또 믿음이란 말처럼 혼란을 갖다주는 말도 없다. 이는 모든 종교들이 다 ‘믿음’을 말하고, 인간관계에서도 ‘믿음’을 으뜸 덕목으로 삼기 때문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붕우유신(朋友有信)’, 중국의 무신불립(無信不立)으로부터 ‘신뢰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스코틀랜드(Scotland)의 속담에 이르기까지, ‘믿음’에 관한 어록이 넘쳐난다.

이런 다양한 ‘믿음’개념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정확한 성경적 ‘믿음’관을 갖는 것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오늘 우리 주위에서, 상황 따라 다양한 색깔을 입고 나타나는 믿음들을 보며 이를 실감한다.

그 믿음들이 때론 ‘소망에 신념이 투영된 모습’으로, 때론 ‘신념에 인격이 입혀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만일 이 모든 것들을 다 ‘믿음’으로 인정한다면, 기독교 신앙이라 해서 특별할 것도 없게 된다. 성경은 ‘믿음’이라고 다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의 지혜 위에 세운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세운 믿음(고전 2:5)’을 확실히 구분지으며,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뚜렷이 한다.

◈그리스도를 중심한 삼위일체 신앙

‘믿음’을 정의(定意)하는 대표적 구절이 아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할 찌니라(히 11:6)”는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신 존재의 전제적 가설(hypothesis, 假說)’정도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기독교인으로 자처하는 이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신이 있다고’가정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전제이지. 기독교라고 특별할 게 없어. 결국 믿음이란 마음먹기 달린 거야”라고 읽는다.

이렇게 가설에 근거한 ‘하나님 신앙’은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이런 신 개념에 견고함과 확신이 따라붙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는 것’은 화목제물 그리스도와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피동적 믿음(passive faith)’이다. 이는 ‘가설’과 ‘추정’에 근거한 믿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전자가 ‘인간 기원적’이라면 후자는 ‘하나님 기원적’이다.

이처럼 ‘하나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사람에 따라 ‘가설에 근거한 믿음’으로, ‘하나님 기원적인 믿음’으로 수납된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모든 성도들의 ‘하나님 존재에 대한 믿음’은 모두 후자에 속한다. 믿음으로 제사한 아벨의 신앙(히 11:4)은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한 삼위일체 신앙이었다.

‘300년 간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의 ‘임마누엘 신앙(창 5:22)’ 역시 화목제물 그리스도에 기반한(마 1:22, 24) 삼위일체 신앙이었다. 죄인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 없인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 역시 ‘그리스도 대망적인(요 8:56)’ 삼위일체 신앙이었다. 또 그가 70세에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생산 불가한 100세까지 그것에 대한 믿음을 견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삼위일체 신앙 때문이었다(롬 4:19-21).

구약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요 17:21)’를 본 삼위일체 신앙이었다면, 신약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요 14:10)’을 본 삼위일체 신앙이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인정했던 세 사람의 신앙도 모두 그런 류였다.

‘자기 집에 오지 않고도 있는 곳에서 말씀만 하셔도 자기 하인이 낫겠다’는 백부장의 믿음(마 8:5-10). 자신을 개로 비하했을 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며 자신을 한 없이 낮춘 가나안 여인의 믿음(마 15:22-28).

옷깃만 만져도 자기의 병이 낫겠다며 예수님의 옷깃을 만진 혈루증 걸린 여인의 믿음(마 10:20-21). 이들 모두는 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삼위일체 신앙을 보여주었다.

◈콘텐츠 신앙이 아닌 인격적 신앙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왜곡된 현상 중 하나가 ‘믿음의 대상(삼위일체 하나님)’보다는 ‘믿음의 내용(자기가 원하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믿음의 대상’은 간과되고, ‘될 줄로 믿습니다’ 혹은 ‘믿으면 된다’ 같은 ‘콘텐츠(contents) 중심’의 신앙, 혹은 ‘소망’이나 ‘신념’에 ‘믿음’을 투영시킨 ‘심리학적인’ 신앙으로 변질되고, 그것들이 곧잘 정통 신앙으로 둔갑한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려고 흔히 도용되는 구절이 ‘네 소원대로 되리라(마 15:28)’는 말씀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주장대로 ‘네가 원하는 것은 그대로 된다’의 인간 욕망에 대한 동의가 아니다.

자신(가나안 여인)을 개로 취급하는 예수님의 멸시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큼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은 데’ 대한 응답이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마 8:2)”는 문둥병자의 믿음도 같은 류이다. 그의 신앙 초점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는 ‘컨텐츠(contents)’보다는 ‘원하시면(당신의 뜻이라면)’이라는 ‘그리스도’에 맞춰진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은 결과이다.

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라는 말씀은 ‘바라는 것을 계속 꿈꾸다 보면 현실화된다’는 ‘모(謀) 목사’의 소위 ‘4차원 영성’ 혹은 ‘콘텐츠 신앙(faith of contents)’의 근거 구절이 아니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의 발로이다. “‘바라는 바’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그의 오심을 통해 ‘실상’이 된다”는 뜻이다.

구약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강림 외에 달리 바랄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 이 ‘바라는 것’에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대입시키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는 ‘장차 실현될 그리스도의 강림이 오늘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했다’, 혹은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오늘의 믿음은 후(後)의 그것의 실현에 뿌리박고 있다’는 뜻이다.

‘믿음’은 불신자들의 주장처럼 허무맹랑한 ‘가설(hypothesis, 假說)’위가 아닌 ‘사실(fact)’위에 근거한다. 사도 베드로가 말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 3:16)”은 기독교 신앙을 잘 함축한 말이다. ‘믿음’은 ‘예수’ 라는 ‘팩트(fact)’에서 발원한다는 뜻이다. 팩트 없인 믿음도 없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시공간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사건’이기에, ‘그것에 대한 믿음’은 그의 강림 전·후(前後) 세대를 불문하고 모두에게 수납될 수 있다.

강림 후(後) 세대는 ‘그것의 성취를 보고’ 믿었고, 강림 전(前) 세대는 ‘그것이 성취된 것처럼’ 믿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리스도의 강림은 ‘역사적(historic)’으로는 ‘장차 이뤄질’ 미래의 사건이었고, ‘초월적(transcendental)’으로는 ‘이미 이뤄진’ 사건이었다. 그는 ‘역사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기뻐했고, ‘초월적’으로는 믿음 안에서 ‘그의 강림을 본’ 자로서서의 기쁨을 만끽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이는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의 강림을 ‘직선적(歷史的) 시간 개념’으로만 보지 않고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는 ‘조망적시각(鳥望的視覺, bird's-eye view)’ 곧, ‘초월적 시각(transcendental view)’으로 본 때문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강림’을 예로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삼위일체 하나님 바라기’가 되기보단 자기들의 욕망을 투영시킨 ‘콘텐츠 바라기’가 되어, 구약 성도들이 그렇게 오매불망했던 ‘그리스도’까지 자신들의 ‘욕망의 컨텐츠’로 대치시킨 불경을 경종한 것이다.

물론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 신앙’을 가진다 하여, 현세적 필요를 구하면 안 된다거나 또 그것을 무조건 반(反)인격적인‘컨텐츠 신앙(faith of contents)’으로 매도할 순 없다.

기도의 모범자이신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시곤,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다(히 5:7)”고 했다.

주기도문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용한 양식’과 ‘시험에 들지 않기(마 6:11-13)’를 구하라고 가르치셨다. 칼빈도 기도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를 ‘구하여 얻는 것’에 두었다.

문제는 문둥병자의 간구가 보여주듯(마 8:2),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