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작은 배 구름 조용 불안 흔들 폭풍우 초조 평안
▲ⓒ픽사베이
본문: 마태복음 5장 5절

산상설교 세 번째에 해당되는 ‘온유에 대한 설교’입니다. 온유의 문제는 각박한 세상에서 참 쉽지 않은 특성으로 보아야 합니다. 갈수록 삶이 전투적으로 변해가는 사회에서 온유하다는 것은 그만큼 여유와 양보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온유는 자칫하면 각박한 생활에서 여유를 부리다가 잘 적응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사람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이 배경을 중심으로 ‘온유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지시를 잘 따르고 순응하는 사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절)”.

온유란 부드러운 심성, 안정된 마음, 유순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렇다고 ‘뼈도 없이 좋은 사람, 무조건 착한 도덕군자’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약속하십니까? 이 말은 언뜻 생각하면 “땅을 가질 사람은 느긋해야 한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땅을 받아도 오래 가지고 있지를 못한다”는 말 같기도 합니다. 물론 흥미롭게도 성격이 급한 사람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 같기는 합니다.

“자기 혈기를 죽이지 끝내 못하는 사람, 고집과 교만을 꺾지 못하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분노와 질투를 잠재우지 않고서는 온유해 질 수 없게 됩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를 정복하고 돌아와 개선 자축파티를 하는 중에 아주 사소한 일로 자기의 심복 부하를 칼로 찔러 죽였습니다. 천하를 정복했지만, 자신을 정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32살에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강자이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는 겉으로는 유연하고 속으로는 강하다는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고 말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은 자 보다 나으니라(잠 16:32)”라고 말합니다.

2. 선의를 가지고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일반적인 상식과 많이 다릅니다. 인간의 역사를 볼 때 ‘땅’이란 힘이 강한 사람, 부유한 사람, 야비한 사람, 난폭한 사람 등이 차지합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서로 빼고 뺏기는 악순환을 거듭하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온유한 사람과는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수시로 소유권이 이전되는 인간 세상의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온유한 모습을 주님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우리 주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도 그 입을 열지 않으신 분,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당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시관을 쓰시고 피로 얼굴 물드시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채로 잠잠히 달리셨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구세주의 그 온유함, 그 은혜와 크신 사랑에 대해” 찬송합니다.

그런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고 권면하고 계십니다. 이런 주님에게서 우리는 온유함이 선의를 가지고 사랑으로 대응한다는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3. 사람을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은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는 사람입니다. 관용(寬容)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관용을 우리는 알기 쉽게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해도 됩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가룟 유다를 자기가 가장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얼굴’로 그렸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데, 도저히 그려지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가룟 유다로 그렸던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사실을 실토하고 용서를 빌고 난 후, 관용의 마음으로 그린 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관용의 대명사로 볼 수 있습니다. 땅 문제로 조카 롯과 마찰이 생겼을 때, 언제나 온유한 마음으로 관용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약삭 빠르게 선취한 롯의 땅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 불비가 내려 멸망을 당했고, 양보하면서 관용의 마음으로 차지한 아브라함의 땅은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온유함에는 모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혈기가 가득한 모세는 동족애로 살인까지 했지만, 40년 광야의 훈련을 받고 난 후에는 “그 온유함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을 이길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권면했을 것입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개인적으로 참된 온유는 “교만과 원망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주님을 믿는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권면했을 것입니다. 기왕이면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주님의 말씀에 순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사랑으로 대하며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관용의 마음으로 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주님의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반드시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