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단절이 가져온 어긋난 관계를 해결하는 법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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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평안하셨는지요.

여전히 코로나19의 기세는 꺾일 줄 모릅니다. 병 하나에 무기력해지는 사람임을 깨닫는 요즘, 여러분은 그래서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이라는 답에 갈 수 있는지, 다양한 응용 문제를 탐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일과 쉼의 균형입니다.

세상으로부터의 멈춤이 있는 자가 바른 생각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을 지키는 것은 여러분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다들 일을 쉬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다 주일까지 놓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분명히 시간은 많아진듯 한데, 왜 주일을 지키는 것이 더 힘들어졌을까 고민해 보셔야 합니다.

둘째로, 빠름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예의를 지켜야 합니다.

빨리 사고 싶고, 빨리 높아지고 싶고, 빨리 돈벌고 싶은 세상 문화는 결국 ‘너’마저 빨리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셋째로, 따름과 끌림의 세상에서 우리는 찔림에 반응해야 합니다.

위로에만 머무르려 하지 말고, 나를 세상으로 끌림에서 찔림으로 다가오는 음성에 즉각 뛰어들어야 합니다. 여전히 머뭇거리는 삶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젊은 시기를 허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20대가 되면서부터 분명히 가졌던 꿈과 비전은 사라진 채 세상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그 삶에 자기도 모르는 가속이 붙었기 때문입니다. 즉각 반응해야만 합니다.

오늘은 대화가 상실된 시대에 대해 나누려 합니다.

1. 사람은 혼자 존재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기대어 있는 존재, 人(사람)은 반드시 서로에게 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잘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언어는 발전합니다. 의지하는 존재이므로, 언어를 통해 우리는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즉 어떤 언어 속에 있느냐는 나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환경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비전과 꿈이 사라졌다면, 어떤 말을 주로 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있는지 중요합니다. 그 사람에게서 독립하셔야 합니다.

2. 문제는 우리가 바른 대상과 이야기를 주고받음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조반을 먹으라.”

그러나 제자들이 대답하지 않고 묻지도 않습니다. 대화가 상실되었습니다. 일방적 전달에 그치고 있습니다.

3. 요한복음 21장에 비추어, 세상 속에 바른 대상과 바른 대화가 사라진 이유를 살펴봅시다.

첫째로, 내가 홀로 서 있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사람에게 의지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제자들은 의지해야 할 대상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끼리 의지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대화이고, 대화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대화를 통해 나는 변화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지각은 선택적입니다.

군중 속에 있을때, 내가 사람에게 의지할수록 바른 언어가 바르게 내게 정립되기는 힘듭니다. 상처 입은 제자들끼리 있으니 이미 영향 받은 그들은 집단적 에너지가 이미 형성되어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상담에 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상처를 주고받은 이들끼리 그저 위로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의 해답은 너무 간단합니다. 게임, 노래방, PC방입니다.

청년들이 자기 비전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해답의 바다로 풍덩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같은 문제를 가진 이들끼리, 그저 편안함과 익숙함의 가면을 쓴 채 잘못된 언어를 주고 받기 때문입니다. 그 언어의 배 위에서 뛰어내려야 합니다.

홀로 멍하니 있을 수 있는 사람의 뇌는 보다 성숙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고요함 가운데 자기를 멈출 수 있을 때만 작동하는 뇌 부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여기저기 사람들과 어울리려는 사람이 그만큼 자기 삶을 변화시키기 힘든 이유는 명백합니다.

4. 또 다른 이유는,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는 알려 하지 않습니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에서 외면합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하셨던 예수님의 말씀 앞에,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아는 고로, 묻는 자도 대답하는 자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것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은 책이 삼국지입니다. 한 스무 번은 읽은것 같습니다. 그런데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매번 새로움 앎으로 다가옵니다.

한 번 갔던 길을 가봤다고, 길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길을 가본 것입니다. 책을 읽음과 앎을 혼동합니다.

사람들은 ‘만남’과 ‘앎’을 착각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았다고 말하며 미워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그들을 보면 참 서글퍼집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았다고 말하는 지성인들을 보면 참 슬퍼집니다. 지금도 무수히 많은 사람이 성경을 50번쯤 읽었다 100번쯤 읽었다, 하면서 셈하고 있습니다. 한 번 읽으나 100번 읽으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성경을 한 번 읽고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앎’입니다. 100번 읽어도 여전히 읽음에만 머무르고, 율법적인 행위에만 목을 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알지 못한 상태입니다.

저는 아직 십자가를 모르겠습니다. 볼 때마다 신비롭습니다. 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 은혜가 됩니다.

우리 인생은 모르는 것 투성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시간은 충분히 많아집니다. 매일 매일이 경이롭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이 사라졌다면, 여러분의 ‘알았다고 하는 착각’ 때문입니다. 그것은 교만하게 합니다.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워하셔야 합니다.

5. 대화 상실의 마지막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는 찔립니다. 그래서 잘못한 사람은 정말 그 사람 앞을 피합니다. 떳떳하면 거리를 두지 않습니다. 전화를 피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쟤들과 안 친해. 쟤는 죄인이야.” 말한 적이 예수님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당당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죄는 진리로부터 벗어나게 만듭니다.

6. 언어의 분리, 이는 성경에서 분명히 죄 때문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위에서 말한 언어 상실의 이유를 그대로 모두 다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 말이 하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말을 합니다. 3절에 보면 ‘서로 말하되’, 4절 ‘또 말하되’, 말을 하는데 자기들끼리 말합니다. 바른 대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들끼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절에 벽돌로 돌 대신삼는 기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는 기술이 좀 있다고 하늘에 닿게 하자고 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줄, 하늘과 맞먹는 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결국 이들의 열망은 욕망이었습니다. ‘우리끼리 흩어지지 말자’였던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그들의 언어를 그래서 분리시킵니다. 9절을 봅니다.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라’.

즉 언어 혼잡의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그 죄는 끼리끼리,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바벨’입니다.

7. 잘못한 사람은 “미안해”라고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과를 잘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진짜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미안해하면서 그 질을 꼭 떨어뜨리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을 붙이는 겁니다. 진짜 “미안해”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Sorry는 Sore, 상처라는 단어와 함께 쓰였던 단어입니다.

네가 아파서, 나도 아픈 겁니다. 그래서 진짜 회개는 아픕니다. 가짜는 율법적으로 기도문만 읽습니다.

8. 언어의 단절이 사라진 사람인지, 한 가지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듯 사람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는가입니다. 못한다면, 회개하신 게 아닙니다. 삶이 바뀐 게 아니니까요.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미안하다고 말하는데 억울하다면, 아프지 않고 화가 난다면, 그것 또한 가짜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 죄 때문입니다.

9. 이기주 씨가 <언어의 온도>라는 책을 쓰면서, 책 서두에 손자와 할머니의 대화를 기록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의 이마를 만지며 열이 있다고, 저녁 먹고 약 먹자고 하자, 손자가 묻습니다. “할머니는 어떻게 내가 아픈걸 잘 알아요?”

이기주 씨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답을 예상했습니다. “할머니는 원래 다 알아”라는 식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대답이 이기주 씨를 울렸습니다. “그건 말이야.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니까 그런거란다.”

자상하면서도 떨리는 할머니의 거친 손이 이기주 씨에게 그대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쓴 책, <언어의 온도>.

우리의 언어는 과연 타인의 아픔을 보고 있는가? 내 상처는 그저 상처로 머물지 않고 타인의 상처를 보고 있는 눈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그 손이야말로 소통의 손이 될 것입니다.

10. 우리는 바른 언어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관계 회복을 수반합니다. 우리 고통의 대부분은 관계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큰 라이벌은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3장에서 둘은 같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 앉은뱅이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꿈과 비전이 있어야 하지 않나요?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만 함께 있으려 합니다. 문제는 거기 있습니다. 진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요한과 베드로의 역사가 나타나지 못합니다.

11.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언어의 단절, 소통의 단절이 죄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 언어를 회복시키는 능력은 성령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이 역시 이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장 강력했던 성령 충만의 역사는 바로 소통의 하나 됨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은 이들을 통해,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처럼 들리도록 하셨습니다. 바벨탑으로 인해 무너진 소통을 성령으로 채워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 충만은 언어를 변화시킵니다. 언어가 변화해야 행동이 바뀝니다. 그 행동의 변화는 단절된 관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12. 사도행전 3장 요한과 베드로는 서로만 하나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을 일으키더니, 8절에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앉은뱅이, 거렁뱅이의 손을 잡고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함께 찬송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베드로가 가족들의 손을 잡고 예배드리러 갔다, 요한이 아내와 함께 예배드리러 갔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서로 친해졌다고, 이제 앉은뱅이 고쳐줬으니 우리 일 끝났다고, 끼리끼리 되지 않았습니다. 성령 충만의 역사가 가져온 것은 놀랍게도 거렁뱅이와 사도들이 하나되는 것이었습니다.

13. 사랑하는 여러분, 대화 상실의 시대입니다.

편한 사람들 주변에 있다가, 여러분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대화를 상실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코로나19의 위기가 여러분과 예배의 참된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다면, 정말 주의하세요.

정말 걱정됩니다. 현실 세계는 그대로 살아가면서, 영적 예배와 영적 관계의 중요함은 상실되어가는 시대가 되지는 않을까 주의해야 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나는 다 안다고 생각해서 진리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안다고 생각하는 만큼, 여러분은 모르고 있음을 잊지 마세요.

매일 매일 경이롭지 않고 감사가 사라졌다면,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무섭게 싹트기 시작했음을 잊지 마세요. 그런 삶은 결국 단절과 분리를 낳고 있을 뿐, 이런 우리 모두에게 성령 충만이 필요합니다. 사라진 기도와 말씀 생활을 먼저 회복하세요.

앉은뱅이와 하나되기 원한다면 내 자신이 먼저 앉은뱅이요, 은과 금을 구걸하는 사람이었음을 잊지 마십시다.

이제 우리 모두 성령 충만을 통해 단절된 이 세상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류한승
▲장애인의 날 기념예배에서 말씀을 전한 류한승 목사 ⓒ미주 기독일보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