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권위 새롭게 해석, 하나님 아들인 동시에
신성 지닌 사람의 아들(인자)로 해석할 수 있어

유대배경으로 읽는 복음서
유대배경으로 읽는 복음서

다니엘 보야린 | 이학영 역 | 감은사 | 256쪽 | 16,500원

유대인들은 신약 성경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도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하며, 1세기 유대인들이 예수와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상황을 읽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제2성전기 문헌을 읽어야 한다. 『솔로몬의 시편』을 비롯해 70인 역의 기원을 다룬 『아리스테아스 편지』뿐 아니라 『다마스쿠스 규칙서』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외경과 위경으로 분류된 문헌들은 신약성서를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은 유대인인 랍비인 다니엘 보야린이 유대인의 관점에서 읽은 복음서에 대한 이야기다. 복음서 자체에 대한 해석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에 대한 재해석이다.

복음서의 주인공이 예수이기에, 당연히 ‘복음서’라는 포괄적 범주로 이해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서문을 쓴 잭 마일스는 보야린의 주장이 유대인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곤란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보야린의 어떤 주장이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모두를 곤란하게 한 것일까? 이제 두 진영을 모두 난처하게 만든 보야린의 책 속으로 들어가보자.

예수는 안식일에 먹는 유대인 전통 음식인 ‘코셔’를 먹었을까? 즉 유대인으로 살았을까? 보야린은 복음서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차이가 뭔지를 다룬다.

유대 전통 음식을 먹고 할례를 행한다면, ‘그 사람은 유대교의 구성원이라 할 수 있을 것(39쪽)’이다. 반대로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면 유대인이라 부를 수 없다.

이러한 구분법은 상당히 애매하다. 현대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대인의 기준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보야린은 ‘예수의 죽음 이후 수세기 동안, 성육신한 메시아로서 예수의 신성을 믿었던 사람들이 있었다(41쪽)’고 주장한다.

예수를 성육신한 메시아로 인정하는 동시에, 전통 유대인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다. 그럼 언제 유대교와 기독교가 분명하게 분리 된 걸까?

보야린은 그 갈림길을 주후 90년경 이뤄졌다는 야브네 회의가 아니라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세워졌다(45쪽)’고 말한다. 유대교가 기독교를 분리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스스로 유대교로부터 분립해 나갔다는 말이다.

“니케아에서 이루어진 결정들은 전통적인 유대교가 가진 믿음, 의식과 새롭게 만들어진 정통 기독교 사이를 확연하게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 이처럼 우리가 현재 기독교라고 이해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니케아 공의회가 만들어냈다. 또한 정말 묘하게도 우리가 현재 유대교라고 이해하는 것 역시 니케아 공의회가 만들어 냈다(46쪽).”

보야린의 주장은 확실히 현대 개신교가 믿는 초대교회 역사와는 사뭇 다르다. 일반적인 개신교 교회사가들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립이 1세기 중후반 이미 일어났다고 확신한다.

넷플릭스 메시아
▲넷플릭스의 <메시아> 중 한 장면. (이 사진은 해당 기사와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 ⓒ크투 DB
특히 1세기 후반, 기독교는 확실히 유대교가 아니었다. 소아시아 지역 등에서 기독교회와 유대교가 분립돼 있다는 증거들은 많다.

그렇다면 보야린은 무슨 근거로, 니케아 공의회를 기점으로 기독교가 유대교를 떠났다고 확신하는 걸까? 제롬의 저술 속에서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이었던 이들을 찾아낸다.

그들은 ‘회당에서 기도했고, 안식을 지켰으며, 음식법과 다른 규례들도 지켰다(49쪽).’ 그럼에도 그들은 기독교인이었다. 물론 제롬은 그들이 기독교인 것을 거부했다.

보야린은 유대인이면서 동시에 기독교인으로 살았던 이들이 꽤나 오랫동안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 책의 본론에서 그 문제를 다룬다.

1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인자)’로 불리는 과정을 통해, 예수가 신격화됐음을 밝혀낸다. 보야린은 다니엘 7장에 등장하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 유대인들은 이미 메시아의 성육신과 이위일체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니엘서 7장의 ‘사람의 아들’ 사상은 『에녹서』와 같은 제2성전기 문헌 속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결국 제2성전기 문헌 영향으로 ‘복음서 안에 칭호로서 사람의 아들이 발전(99쪽)’했다고 믿는다.

2장에서는 『에녹1서』와 『에스라4서』를 통해 다시 유대인들은 예수가 사용했던 ‘사람의 아들’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복음서의 혁명성은 ‘오직 그 사람의 아들이 이미 여기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선언(169쪽)’한 것이다. 3장과 4장에서는 유대인으로서의 예수를 살핀다.

이 책은 그동안 개신교회가 가진 획일적인 신약성경에 대한 이해를 다층적이고 입체적으로 바라보도록 돕는다. 특히 2장과 3장에서 예수의 권위를 새롭게 해석함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아들인 동시에 신성을 지닌 사람의 아들(인자)로서 유대인들이 해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보야린은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대했으며, 기독교인들이 확신했던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결코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복음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적지 않은 유대인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하던 바였다. 보야린의 결론은 아래 문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복음서의 유대교는 쉽게 말해 전적으로 유대-메시아 운동이었으며, 복음서는 유대적인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247쪽).”

그렇다면 앞으로 복음서를 읽을 때, 좀 더 유대적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제2성전기 문헌을 통해 신약을 이해하려 했던 한계를 벗어나, 유대인으로서 기독교인이 가능하다는 이해로 확장될 수 있다. 앞으로 복음서를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