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김재성 박사(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조직신학).
본격적인 청교도 운동이 확산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순교자들의 희생과 헌신이 당대의 성도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청교도 운동은 어떤 특별한 천재나 영웅이 성취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헨리 8세와 궁녀 앤 볼린 사이에 태어난 엘리자베스는 충분하게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파악할 수 있는 나이인 25세에 왕좌에 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완고한 성격과 르네상스 지식인들이 갖춘 우월함을 겸비했다고 알려져 있다. 개신교의 희망을 한 몸에 받고 권좌에 오르고 난후, 수많은 왕자들과 귀족들에게 청혼을 받으면서도 결코 어떤 한 사람에게도 허용하지 않는 정치적 수완을 보여주었고, 외국 가톨릭 국가들의 견제로부터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 나갔다. 1559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제 3의길”이라고 부르는 절충형 중도노선 (via media)을 선포했다. 칼빈에게 영향을 입은 후 여왕이 통치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하는 낙스의 태도와 설교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여왕은 제네바에서 돌아온 지도자들에게 교회의 고위직을 맡기지 않았다. 그녀가 취한 조치들에 대해서 개신교회 성도들은 극히 실망하고 말았다.

하나로 통일된 영국 국가교회 체제를 유지해야만 자신의 통치권이 강화되어질 수 있다고 믿었던 엘리자베스는 청교도 목회자들의 설교를 싫어했다. 할 수만 있으면 설교를 못하게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이라고 받아들였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설교야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식이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의 수단이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예식에 따른 의식적인 방식들이 오랜 전통으로 고착되어 있었기에, 말씀에 근거한 충분한 설교가 없었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하던 시대는 교회가 타락했다는 말이다. 거의 모든 교회에서 성공회 주교들과 청교도 성도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벌어졌다. 주교들은 청교도들이 설교에 대해서 공격하자 불공정한 일이라고 반발했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새로운 노선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개신교 신앙운동으로서 끊임없이 순결한 교회를 추구하는 발자취를 남겼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모든 교회의 지위와 재산을 지배하고 소유하던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자신의 통치권을 확대하려는 차원에서 온건한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여전히 국왕이 교회의 머리가 되어서 지배자로 군림하는 체제였기에 보다 전진된 교회의 개혁을 원하던 사람들은 이를 거부했다. 청교도들은 교회의 자치권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실현하고자 했다. 청교도가 빛을 발휘하면서 지금까지 기억 되는 이유는 핍박을 견디면서 순수한 교회를 지키고자 고난과 박해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취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칼빈주의 장로교회 제도를 싫어했는데, 자신의 통치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는 주교정치제도를 고수하려는 속셈에서였다. 여왕은 1559년 4월에는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키고, 여왕이 교회보다 우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은 ‘최고의 통치자’에게 반역죄로 다스렸다. 1563년에는 종교정책의 세부사항들을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을 발동해서, 성직자들의 의복이나 예식규정에 순응하지 않았던 주교들은 감옥에 던져지는 징계를 받아야만 했다. 유럽의 종교개혁에서 영향을 받은 개혁적인 지도자들은 로마 가톨릭의 의식을 약간 수정한 정도에 그치는 예식서에 복종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이런 정치적인 현실과 타협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통치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여왕에게서 존경받을만한 권위와 지위를 부여받아 누리던 타협주의자들도 많았다. 켄터베리 대주교 존 휘트기프트가 대표적인 타협주의자로서 통일령을 강조했다. 또한 국교회 체제에 순응했던 리챠드 후커는 저명한 칼빈주의 신학자로 명성이 높아졌다. 1563년에 주교들이 일련의 추가적인 개혁조치를 건의했으나,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66년 의회에서 다시 변경을 청원했지만 완고한 엘리자베스 여왕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개혁파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교회 지도자들은 1560년대부터 1640년까지 잉글랜드 국교회 안에서 여왕이 제시한 규정들에 대해서 무조건 순응할 수 없었다. 이 시대의 세속 정치와 영국 국교회는 서로 충분히 체계적인 정립을 하지 못한 채,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통일령”에는 에드워드 6세 시대에 시행된 토마스 크랜머의 「공동기도서」를 개정하여 공포됐는데, 성상과 십자가상을 허용하였고 성직자 예복을 재차 강조했다. 성자들의 날을 지정하여 지키도록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고, 예식을 따라서 의무적으로 진행되던 로마 가톨릭의 예식주의가 깊이 배어있었으며, 암송해야할 규정들도 들어있었다. 로마 가톨릭의 잔재들을 제거하기 원했던 개신교회 성도들은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규정들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초반에 교회의 신학적 정체성과 구체적인 모습을 놓고서 다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1560년대에 한 소수의 목회자들이 세례를 줄 때에 십자가 모형을 들고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과 결혼식을 거행하는 중에 종을 울리는 것과 예배를 진행하는 동안에 흰색으로 된 성직자 예복을 착용하는 것 등에 대해서 반대하였다. 이것은 곧바로 영국 성공회와 청교도들 사이에 “성직자 예복 논쟁”(the Vestarian Controversy, 혹은 vestments controversy)으로 발전하였다.

이 논쟁을 촉발시킨 가장 큰 사건은 1564년에 벌어졌다. 험프리와 샘슨은 파커 대주교에게 호출을 당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규정한 성직자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직예복 논쟁은 영국 내부의 청교도 신학자들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외국 신학자들도 개입하는 큰 문제로 등장하였다. 특히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자 불링거와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역할도 간여하였다. 토마스 샘슨 (Thomas Sampson, 1517-1589)은 메리 여왕 때에 제네바에 피신해서 성경번역에 참여했었기에 일생 동안 로마 가톨릭에 저항하였고, 청교도 신앙을 고수하다가 대학교수직에서도 쫒겨났다. 로렌스 험프리 (Laurence Humphrey, 1527?-1590)도 샘슨과 함께 제네바에서 머물다가 귀국하여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로 활약했다. 샘슨과 험프리는 성복착용을 거부한 주역들로서 활약하였는데, 두 사람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재학시에 피터 마터 버미글리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성복논쟁은 더 심각한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이 논쟁은 하나님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은 사람이 실제 생활에서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고 시행하느냐의 문제였다. 교회의 본질에 관련된 사항들을 현장에서 시행하려 할 때에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를 놓고서 본질적인 요소에 대한 고민들을 표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 회의가 소집되었을 때에, 대주교 파커는 단 한 가지 통일령을 강제로 집행하려고 시도했다. 소수의 청교도 목회자들은 생계의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통일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담임 목회자의 직무를 더 이상 수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이런 목회자들을 따르던 일반 성도들은 너무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직자 예복논쟁”이 제기된 지 십 여 년 어간에, 청교도 목회자들이 상하 조직으로 구성되어진 성공회 교회의 정치체제를 폐기할 것을 의회에 청원하였다. 청교도들은 말씀으로부터 치리를 받고 교훈을 판단하는 장로회 체제가 신약성경에 나와 있는 기본적인 제도라고 주장하였다. 1573년 10월 6일, 요크 지방의 주교 매튜 헌톤이 “처음 시작할 때에, 성직자 예복 논쟁은 모자와 중백의와 어깨걸이 정도였으나, 지금은 점차 확산되어서 주교들, 대주교들, 대성당들, 조직 전체를 무너뜨리려고 한다”고 보고했다. 성공회 교회정치 제도에 대한 공격은 성직자 예복 논쟁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질문들로서 거의 모든 신앙인들의 생활에 관련을 맺고 있는 문제였다.

지속적으로 성공회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서 시정을 요구하는 논쟁들이 확산되어갔다. 주일성수를 철저하게 지켜야만 한다는 장로교회 지도자들은 영국 성공회가 받아들인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교리와 예배의식에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퓨리턴들이 성공회 집권층에 요구했던 것은 성례를 말씀에 근거하여 올바로 집례하자는 것이고, 권징을 시행하려는 것이며, 설교에서도 자유권을 달라는 것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윌리엄 풀크 (William Fulke, 1538–1589)는 성직자들에게 의무로 부과된 성직 예복을 착용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윌리엄 풀크 (William Fulke, 1538–1589)는 성직자들에게 의무로 부과된 성직 예복을 착용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경건한 목사들은 단지 성복착용만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열정적인 개혁자들은 그들의 교구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예식의 내용들을 완전히 생략해 버리고, 설교에 더 많은 시간을 집중시키면서 시편 찬송을 도입하였다. 일부 목사들은 세례를 시행할 때에 십자가의 성호를 긋던 관행을 생략해 버렸다. 일부에서는 결혼식에 반지를 교환하던 관례도 폐지시켰다. 오르간을 반주에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절하는 풍습도 없앴다. 무엇보다도 ‘중백의’(the white surplice)라고 하는 예복을 거부하고, 성직자 모자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1565년 1월 대주교 매튜 파커를 불러서, 어찌하여 교회의 예배 규정을 거역하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데 방관하느냐고 심하게 비난했다. 런던과 대학교를 대상으로 예식규정에 서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모든 영국교회의 성직자들은 ‘중백의’를 걸치고, 모자를 써야만 한다는 규정을 엄격히 적용했다. 런던에 있던 서명 거부자들 (nonconformist), 혹은 비서명자들이 주요 대상으로 거론되었고, 1566년 3월, 37명의 런던 목사들이 면직을 당했다. 성직자들의 예복 착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왕권이 바뀌게 되자, 제임스 1세의 강화된 통치하에서 수많은 성도들이 유럽으로 피신을 갔고, 신대륙 아메리카에 정착했다. 청교도는 뉴잉글랜드의 정치와 사회에 근간을 이루는 정신으로 크게 영향을 끼쳤고, 훗날 세계선교가 확산되면서 지구촌 곳곳으로 전파되어졌다. 중국, 인도, 일본, 특히 한국에 온 19세기 초기 선교사들이 품고 있었던 개인의 경건한 삶과 교회관, 정치적인 가르침들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