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구원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율법주의, 신율주의, 신인협력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 하는 것도 다 율법에 대한 ‘이해의 상이성’에서 나온 구분이다. 그것들의 기준은 율법을 ‘최종 목적지’로 삼느냐 아니면 ‘과정’으로 삼느냐이다.

◈율법 앞에서 절망으로 멈춰선 사람들

죄인이 율법 앞에서 ‘나는 구원 얻는데 자격 미달이야’라는 반응을 나타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율법 앞에서 그런 겸비한 태도를 갖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이는 율법을 주신 목적이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롬 3:20)’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기서 멈춰 서버리고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데 있다. 율법 앞에서 정죄(condemnation, 定罪)를 받는 것은 율법의 중요한 목적이기는 하나, 율법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아니다. 죄인이 ‘율법의 정죄’를 받고 절망하여 전진을 멈추는 것은 ‘율법의 목적’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정죄가 율법의 최종 도달지가 아니다’는 것은 ‘죄인에겐 궁극적 절망은 없다’는 말과 같으며, 이는 재생 불가한 죄인까지도 절망하지 않도록 만든다.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느니라(잠 24:16)”,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마 18:22)”는 말씀들을 일상 용어로 표현하면 ‘구제불능의 인간은 없다’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고상하게 표현하면 ‘정죄가 율법의 최종 도달지가 아니다’는 뜻이다.

예수를 판 ‘유다(Judas)의 죄’가 작은 죄는 아니지만, 그런 ‘유다’에게도 율법은 그를 ‘정죄’하는데 목표를 두지 않았다(독일 신학자 칼 바르트는 유대인을 6백만이나 학살한 히틀러까지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유다’ 자신은 ‘정죄(condemnation)’를 ‘율법의 최종 목적지’로 삼고, 율법이 지향하는 바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다 자살로 마감했다(마 27:5).

이는 비단 ‘유다’ 한 사람에게만 한정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율법의 최종 목적지’로 삼음으로써, 더 이상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들은 율법 너머 또 다른 세계가 준비돼 있음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율법’이 죄인을 ‘정죄’한 후, 그를 ‘다음 단계로 넘겨주는 것’까지 할 때, 비로소 그 소임을 마친다는 것을 모른다.

‘율법’ 너머 죄인을 기다리고 계신 분이 ‘그리스도’시다. 그는 율법으로부터 ‘정죄 받은 죄인’을 넘겨받아, 구원하시려고 그곳에 서 계신다. ‘율법’으로 하여금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넘겨주지 않고 그를 붙들고 있게 하는 것은 율법으로 ‘월권’을 행하게 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훼방하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그들의 최종목적지로 삼으므로 자신을 저주에 빠뜨리고, 율법을 불법자로 만든다. 다시 말하지만, 율법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을 정죄하는데 까지’가 아니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까지’이다.

율법의 ‘몽학선생 역할’이 그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성경에서 ‘율법이 가르치는 바가 그리스도’라고 한 것은 ‘율법의 최종 목적이 정죄가 아닌 구원’임을 의미한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행 28:22)”.

‘율법’에 ‘그리스도라’는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지만 사도들은 ‘율법’의 행간(行間)에서 그것을 읽어냈다. 그 행간에서 ‘율법’과 ‘그리스도’ 사이에 놓인 연결고리를 보았고, 둘에서 ‘그림자와 실체’의 관계를 보았다. 사도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 구약의 성도들도 다 그랬다.

유대인 문자주의자들은(literalists, 文字主義) 율법의 행간을 읽어내는데 실패했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 그들을 “모세의 얼굴을 덮은 ‘율법의 수건’이 그들의 마음을 덮어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했다(고후 3:13-14)”고 표현했다.

율법에 대한 그들의 무지는 ‘제사법(祭祀法)’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율법의 요구인 ‘죄삯 사망(롬 6:23)’을 위해 짐승제물을 바칠 때 그것에서 ‘실체’인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그림자’인 짐승제물 만을 보므로 ‘제사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히 10:1-5)”.

아벨, 아브라함, 다윗을 비롯해 구약의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 ‘그림자’인 ‘짐승 제물’ 너머 ‘실체’인 ‘그리스도’를 보므로 ‘제사의 목적’에 도달했다.

◈율법 앞에서 자신감으로 멈춰선 사람들

반대로 율법 앞에서 절망하지 않고 구원의 자신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곧 자신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이 자체만으로 무조건 잘못됐다 할 수 없다.

구원은 ‘율법의 의(義)’를 마련한 자에게만 주어지며, 이 ‘율법의 의’를 갖지 못한 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의’가 ‘율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의냐 아니냐?’, 곧 ‘하나님의 의’냐 ‘사람의 의냐’ 가 관건이다.

만약 그가 내놓은 ‘의(義)’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율법을 충족시킬 수가 없다. 예수님이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고 하신 말씀에서 보듯, 구원 얻는 데는 ‘인간의 율법적 의(義) 이상의 의(義)’ 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자기 의를 율법에 대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율법의 수준을 너무 하찮게 본 때문이고, 둘째는 율법 자체가 과정이지 종착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한 때문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는 말씀에 이 둘의 답이 다 들어있다. 곧 ‘율법 앞에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롬 3:20)’을 만큼 율법의 수준이 높다는 뜻이고, ‘겨우 죄만 깨닫는 하는 것으로 그치는 율법은 긍극적인 도달지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율법에서 ‘자기의 죄’를 보지 않고, ‘자기 의’를 보았다는 것은 율법을 오해하여 그것을 ‘최종 목적지’로 삼아 거기서 멈춰버렸다는 뜻이다. 그 결과 율법이 인도하는 ‘최종 목적지인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구원의 실패를 낳았다.

구약의 ‘짐승 제사’는 인간이 ‘율법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 곧 율법이 최종적인 목적지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제사의 목적’이 무엇인가?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속죄(贖罪)’이다. 인간이 율법을 성취할 수 있었다면, ‘제사법’을 주셨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범죄 후 하나님이 그들에게 ‘도덕법’과 ‘제사법’을 주신 것은 유대교도들(Judea)의 오해처럼, 두 법의 준수로 율법을 성취하여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의행(義行)’으로 열심히 ‘율법의 의’를 이루다가 혹 그것에 이르지 못할 경우, ‘제사로 속죄’를 이루어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신인협력주의자들, 신율주의자들이 ‘선행’과 ‘그리스도의 속죄(제사)’를 구원의 조건으로 말한 것도 이런 유대교도의 사상에 근거한다).

그것의 진의는 ‘율법’으로 죄를 깨달아 ‘어린양 그리스도께’로 가서 ‘속죄’를 받으라는 뜻이다. 율법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몽학선생이다(갈 3:24).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절망해버림으로 율법에서 멈춰서버리든지, 율법 앞에서 ‘의(義)의 자신감’으로 율법 앞에서 멈춰서버리든지 하는 것은 모두 도중하차이다.

그 결과 ‘최종 목적지’인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롬 10:4)’께로 가지 못하게 하므로, 그를 구원하려고 준비하신 ‘하나님의 의’를 입지 못하게 된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