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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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한복음 21장에는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응용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예수라는 진리로 가야 하는지, 그에 대한 식도 풀이하고 있습니다.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는데, 첫 번째 문제는 열심히 일함을 요구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에 대해 우리는 안식과 쉼을 구별하는 식을 배웠습니다. 안식의 참된 의미를 아는 사람이 제대로 쉴 수 있습니다. 잘 쉬는 사람이 올바른 일을 하는 법입니다.

둘째로 세상은 빠름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더 빨리 ‘더, 더, 더’를 외치는 세상에서 참을성이 사라졌습니다.

서로에 대한 예의 없는 빠름은 결국 폭력이 되고 말았습니다. 믿음을 폭력으로 수단화했던 과거 역사들을 오늘도 반복하고 있습니다.

힘을 가진 존재일수록 그 힘을 예의없이 휘두르면 폭력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힘, 교회에게 주어진 힘은 막강한 힘입니다. 하나님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예의없이 사용하면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분열을 초래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 오늘은 세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이 만나게 되는 세상의 문제 중 ‘따름의 세상’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사람’에 대하여 두 가지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존재론적 관점입니다.

존재는 있을 존(存)이라는 한자를 씁니다. 이 한자는 ‘있다’는 뜻도 있지만, ‘살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자 모양을 보면 아들 자(子)라는 한자가 부수입니다. 아들 자(子) 위에는 지붕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있을 재(在)라는 한자는 혼자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이 막아주고 또 다른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들, 즉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존재론적으로 사람은 홀로 설 수 없습니다. 의존적 존재입니다. 의존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이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람 인(人)이 서로 기대어 있는 이유입니다.

3. 의존적 대상에게 필요한 것은 의존할 대상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의존의 이유는 자기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의존해야 할 대상은 무너지지 않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의지하고 생을 산다는 것은 늘 불완전합니다. 외로운 이유입니다. 사람을 보고 만족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무너지고 실망할 때쯤, 또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러분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의존해야 행복한 건 맞습니다. 중요한 건 의존해야 할 대상이 무너지지 않고, 우리를 채워줄 충분한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안타깝지만 세상에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존재론적으로 모든 세상의 것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홀로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의존적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불교에서는 연기론까지를 깨달았을 수 있습니다. 돌고 도는구나, 모두 의지하는구나.

그래서 실제로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어, 어떤 것도 온전한 ‘나’일 수 없습니다. 나는 네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여전히 누군가를 따르는 세상 한복판에 여러분은 서 있습니다.

참으로 공포스럽게도, 세상이 그러면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던데요?

“나다워져!”
“너답게 살아!”
“난 나야!”

모두 거짓말입니다. 혼자 존재할 수 있는 ‘나’는 없습니다.

5. 그런 우리에게 놀랍게도 성경만이 우리에게 한 분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자기 소개를 스스로 이렇게 하셨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야(출 3:14)”.

영어 성경은 “I am who I am”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가 모세를 보냈느냐고 물을 때 “나다”라고 말하는 분이라고 이야기하라고 합니다. 즉 이 땅 만물 중에 “나다”라고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분명한 겁니다. 아니, 내가 온전히 불안하지 않고 채움받을 대상은 한 분밖에 없습니다.

6. 뿐만 아니라 목적론적으로 사람은 무엇인가를 쫓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언가를 좇아가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자신이 좇는 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끌림’입니다.

그래서 사라질 것에 끌리면 죽는 겁니다.
영원한 것을 좇으면 영원해지는 겁니다.

사라질 것들은 대개 자신을 요란하게 포장합니다. 그런 것일수록 포장이 요란합니다. 영원한 것은 보이는 것에 치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7.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속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수명이 있는 것에 목숨겁니다. 여러분이 의존적 존재인 것을 알고 있는 세상이 잘못된 것을 쫓게 만듭니다. 잘못된 것에 끌리는 이유는 대개 사람의 말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많은 제자들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단 한 마디, 베드로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나 물고기 잡으러 간다.”

그 소리에 제자들은 반응했습니다. “나도 따라갈래.”

8. 잘못된 것인줄 알면서도 따르는 이유는 ‘분리불안’ 때문입니다.

버려지고 떨어질까봐, 나로서는 완전치 않으니, 그런데 잘못된 것을 쫓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를 좇았던 제자들의 모습이 잘못된 이유는 베드로가 잘못된 것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냥 닮아버립니다.

우리도 베드로와 제자들의 모습처럼, 무언가를 좇고 있고 누군가를 좇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를 뒤따르게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입니다.

분명 믿음의 결단을 할 때마다, 여러분에게 말로 도전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험은 꼭 결단할 때 찾아옵니다.

9. 여러분, 우리에게는 영원토록 우리를 버리지 않는 존재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떠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그 기업을 떠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94:14)”.

중요한 사실은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겁니다. “난 절대 안 떠나.”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말은 거짓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존재가 아닌, “난 나야”라고 말하신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관계에 의지하지 않는 존재, 완전함과 충만함으로 채워진 존재만이 가질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존재가 필요합니다.

10. 베드로가 결단합니다.

디베랴 호숫가에서 누군가가 옆에서 저 멀리 계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겉옷까지 갖춰 입고 말입니다. 아니, 배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물고기가 가득 차 있는데도 말입니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각적 반응, 디베랴 호숫가에 유일한 행동을 보인 사람은 베드로였습니다. 바로 이 베드로에게 주님이 사랑의 대화까지 이어가심을 잊지 마세요.

11. 사랑하는 여러분.

실제로 이 세상에는 우리를 현혹시키는 수많은 말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 가까운 사람들이, 현실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할 겁니다. “돈 벌러가자.”

그러나 그 와중에도, 여러분에게는 진리의 말씀이 계속 들려오고 있지 않습니까?

따름의 시대, 불완전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바다로, 호수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 물 속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 물은 예수님이 친히 폭풍을 뚫고 걸어가셨던 물입니다.
그 바다는 예수님꼐서 잠잠하라 하면 잠잠해졌던 바다입니다.

저 호수 너머가 희미하다고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저 호수 너머에는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시고, 이미 준비 완료하신 여호와 이레의 주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2. 더 이상 관계로 인해, 돈으로 인해 용기없는 삶을 살지 마십시오.

왜 여전히 우리 삶이 디베랴인가? 왜 여전히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도 돈을 좇고 명예를 우선시하고 안정적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가? 왜 여전히 무엇에 도전해야 한다는 이상속에 맴돌 뿐, 뛰어들지 못하는가?

해답은 간단합니다. 절대적이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실제로는 사람과 돈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너머에는 깊은 불안이 잠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합니다.

13. 여러분이 믿음으로 뛰어들면 하나님도 반응하십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뉴턴의 제3의 운동법칙은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작용할 때, 다른 물체는 마찬가지로 반작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걸어가는 이유는 나만의 힘이 아니라 내가 걸어갈 때 지구가 다리를 밀어주기 때문입니다. 더 빨라질 수 있는 이유는, 지구가 질량이 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작기 때문에 점점 가속도가 붙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마어마하게 크십니다. 그리고 우리 욕심도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어디로 걸어가고 계신가요?

그것이 베드로가 만난 기적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생선을 가져오라고 할 때도, 베드로만 혼자 반응했습니다.

그때 분명히 끌어올리지도 못할 만큼의 많은 생선을 베드로 혼자 들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정도의 물고기면 그물이 상하는 게 당연한 상식마저 무너지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음을 두 손으로 경험한 것도 베드로 혼자였습니다.

14. 내가 결국 오늘 하루, 돈과 사람에 의지하는 삶을 살면 그 삶이 비록 하루라 해도 급속도로 세상의 사람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겁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 결심하고 믿음의 삶을 결단하면, 그 삶은 점점 가속도가 붙어 기적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채워주심을 만나게 됩니다.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하나님은 반응하지 않았는가 질문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말씀대로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두려운 호수 위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늘 믿음은 이성적 그리스도인이라는 보기 좋은 용어에 여전히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깨어나지 못한 믿음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15. 사랑하는 여러분, 따름의 세상 디베랴에서, 기적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 주변의 언어를 점검하세요. 누가 여러분에게 물고기를 권하는가? 입만 열면 그것으로 묶으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혹시 자기 자신이라면, 여러분의 언어는 누구를 묶어두는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신 말씀에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말씀은 보편적으로 주어지지만, 개별적으로 반응하는 이에게 그 사람만 경험하는 은혜로 채워지게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내게 주신 것으로 받아들인 자에게만, 베드로의 기적이 임할 것입니다.

류한승 목사(생명샘교회)